타임(Time)지가 강력히 비판한 진화론의 문제점들
고건, 서울대 전산과학과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02
타임(Time) 지는 최근 세 차례 진화론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한번은 생의 기원에 대해서, 또 한번은 진화에 대해, 그리고 한번은 인류의 조상에 대해 각각 표지를 장식하는 특집기사를 보도했다. Time 지는 세계 누구나 그 권위를 인정하는 시사주간지이다. 이러한 Time 지가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 근거가 희박하고 이제 폐기될 수밖에 없는 이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아래에서는 이 세 기사를 중심으로 세계 유명 시사주간지에 조명된 진화론의 현주소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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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조상에 대해서는 Time 지가 1994년 3월 14일에 표지기사로 실었다. 여기서는 그 기사 중 가장 중심 부분인 네안델탈인에 대한 글을 소개한다. 네안델탈인 화석을 처음 조사한 과학자는 불란서 사람 Boule이었다. Time 지에 의하면 그는 그 시대를 풍미하던 다윈의 진화론에 매우 부담을 느낀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그는 네안델탈인을 인류와 원숭이 사이의 연결고리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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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이후로도 계속 네안델탈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연구가 되면 될수록 인류와 네안델탈인들은 완전한 다른 종임이 입증되고 있을 뿐이다. 1997년 12월 17일 CNN은 영국 과학자들이 네안델탈인의 DNA를 조사해 본 결과 네안델탈인은 인류와 무관한 종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 교과서는 오늘날까지도 네안델탈인을 인류의 조상으로 고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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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지는 인류의 조상에 대한 특집을 마감하며 이 분야를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주장은 사실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한낱 상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결론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모욕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생업에도 큰 지장을 줄 수 있다. 과학이 아닌 상상따위로 알려지면 더 이상 연구비, 교수 승진 등을 기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Time 지 독자란에 아무런 항의도 없는 것을 보면 이러한 모욕적인 기사에 대해 별달리 항의할 근거도 없는 것 같다.
전문적인 논문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 고건이라는 서울대 교수는 '전산학과' 교수로 비전문가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타임지는 원래 일반인들을 위한 잡지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타임지에서 정말로 진화론을 모욕했을까? 흥미진진하다.
위 그림 처럼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창조과학회 표현)' 표지기사를 실제로 살펴보자.
타임지 3월 14일자 표지기사
http://content.time.com/time/printout/0,8816,980307,00.html
인류의 조상에 대해서는 Time 지가 1994년 3월 14일에 표지기사로 실었다. 여기서는 그 기사 중 가장 중심 부분인 네안델탈인에 대한 글을 소개한다. 네안델탈인 화석을 처음 조사한 과학자는 불란서 사람 Boule이었다. Time 지에 의하면 그는 ...
고건교수는 두 번째 문장에서, 기사의 '가장 중심 부분'이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했다. 마침 원문의 앞부분에 '네안데르탈'이란 단어가 나왔다. 어떤 내용들이 나오는지 보자.
"Starting with a Neanderthal skeleton unearthed in Germany in 1856, archaeologists and anthropologists have sweated mightily over excavations in Africa, Europe and Asia ......"
끝.
참 당황스러운데 아무리 읽어봐도 없다. 중심 부분이 없어요! 이 기사는 네안데르탈인에 대해서 전혀 다루지 않았다. 94년 시점의 새로운 화석들, 네안데르탈인보다 오래된 그 화석들이 인류 진화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가설을 탄생시키는지 등이 나오지 그 어디에도 네안데르탈인에 대해서는 없다. 블란서 과학자 Boule? 기사 전문을 검색해도 그런 이름 안 나온다. 놀랍게도 고건교수의 저 많은 문장에서 참말은 첫 문장 딱 하나.
"인류의 조상에 대해서는 Time 지가 1994년 3월 14일에 표지기사로 실었다.".
두 번째 문장부터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기사 "How Man Began"과 전혀 상관없다. 결론은 하나. 이 고건이라는 사람은 이 타임지 기사를 읽은 게 아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기사 내용이 하나도 없다. 정작 표지기사에는 중국 과학자들의 네이처 보고, 호모 에렉투스,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파란트로푸스속, 호모 하빌리스 (handy man) 등이 나오는데 한 마디도 없다. 그리고는 기사에 있지도 않은 네안데르탈인 이야기로 도배했다. 게다가 위 글의 요점이 도대체 뭔가? 94년 타임지에는 전혀 없는 97년 이야기라지만 아무튼 인용한다.
"연구가 되면 될수록 인류와 네안델탈인들은 완전한 다른 종임이 입증되고 있을 뿐이다. 1997년 12월 17일 CNN은 영국 과학자들이 네안델탈인의 DNA를 조사해 본 결과 네안델탈인은 인류와 무관한 종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 교과서는 오늘날까지도 네안델탈인을 인류의 조상으로 고집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의 조상인지 아닌지 화석증거가 불충분해서 진화론에서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무슨 교과서? 90년대까지의 인류의 진화에 관련된 자료를 도서관 등에서 찾아보면 네안데르탈인 소개에서는 거의 대부분 과연 현대 인류로 이어졌는지, 아니면 그냥 절멸해서 사라졌는지 수수께끼라고 나온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했다. 인류의 조상이라고 고집한 적도 없고,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와 무관한 종으로 밝혀져도, 혹시 현대 인류의 선조와 일부 교배한 증거가 나와도 아무 문제가 없다. 중요한 점은 어떤 시기에 네안데르탈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시기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증거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어떤 증거가 나올지 궁금할 뿐이다. 마치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와 관계없다는 증거가 나오면 진화론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왜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은 여기에서 고건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진다. 창조과학이 틀렸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인류와 무관하다?!
그런데 창조론은? 고건이라는 사람은 '창조과학회 이사'라면서 창조과학회 글도 안 읽나? 네안데르탈인 자체를 부정하는 주제에 뭘 이야기하겠다는 것인가?
네안데르탈인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창조과학회)
"네안데르탈인은 인간(human)이었다. ... 네안데르탈인의 해부학적 신체구조의 차이는 극히 근소하여 대부분의 경우 유전학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이, 열악하고 한냉한 기후조건 하에서 거칠게 살았던 삶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다."
네안데르탈인이 완전한 현대인이었다는 추가적인 증거 (창조과학회)
"모든 인간은 아담과 노아의 후손이며, 바벨에서 다른 언어 그룹으로 분산 되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은 이들 그룹 중의 하나, 또는 다른 그룹의 유골들이다. 그들의 독특한 특성은 최근의 발견된 이빨의 증거에 의해서 더 확인된 것처럼, 현생 인류라 불리는 것의 범위 내에 있다."
네안데르탈인 - 변화되고 있는 실상 (창조과학회)
"성서적 창조론자들은 어떤 때에도 '반인간'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네안데르탈인 화석들은 모두 대홍수 이후의 것들이고, 그래서 그 뼈들은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지던 인류 중에서 갈라져 나간 한 그룹의 것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다. ... 네안데르탈인이 완전한 사람이라는 이러한 보고서들의 대부분을 일부 과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맹목적인 진화론적 편견 때문일 것이다."
진화 역전 : 네안데르탈인은 없다? (창조과학회)
"네안데르탈인 동포들이 우리 모습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고 해서, 그들을 현대인과 다르게 분류하고 야만인으로 바라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루마니아의 네안데르탈인은 현대인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창조과학회)
"만약 네안데르탈인이 우리와 교배(interbreed)되어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우리였다. 거기에 어떠한 의문이 있는가?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이 인간보다 열등한 유인원이었다는 150여년 간의 신화는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네안데르탈인 : 자연선택이 아닌 무작위적 유전적 부동 (창조과학회)
"네안데르탈인 신화는 죽은 것이라고 계속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 ... 네안데르탈인과 '현대인(깊이 뿌리박힌 진화 가정들을 주목하라)"은 37만년 전에 어떤 신화적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그러나 모든 기간 동안 말 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새로운 진화 신화는 낡은 신화보다 나은 것이 없다. 진화 신화들은 찰스 다윈에게 충성하여 희생 제물로 헌납된 뼈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 뼈들에는 살코기가 전혀 없다."
네안데르탈인이 3만년 만에 입을 열었다? (창조과학회)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약간의 골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이 땅의 다른 인류들과 거의 다르지 않은, 지적으로 높은 수준의 인간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아담의 후손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돌고래를 먹고 있었다. (창조과학회)
"왜 네안데르탈인은 약간의 골격 차이로 인해 다른 종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이 고건이라는 사람이 사용한 수법은 이렇다. 정작 타임지가 소개한 인류 진화의 다양한 중간화석에 대한 과학적인 성과 소개는 전부 무시하고, 단지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타임지' 이름을 가짜로 인용했다. 타임지에서는 인류 진화론을 소개했는데, 반대로 진화론을 모욕했다는 사악한 거짓말을 썼고, 창조과학회는 그걸 십 년 넘게 우려먹고 있다. 그리고 엉뚱한 네안데르탈인 이야기를 도배했는데, 어이없게도 네안데르탈인 존재 자체를 일관되게 부정하는 자기들과 모순된 글을 썼다. 네안데르탈인이 인간과 다르다는 게 밝혀지면 진화론이 무너질 것처럼 빈정거리면서. 그런데 만일 그런 증거가 나온다면 무너지는 건 창조론이다. 위 창조론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고생물학과 과학에 무지한 공학 관련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고건이라는 사람은 이 타임지 기사를 하나도 안 읽었을까? 사실은 마지막 한 문장 또는 반 문장을 읽은 것 같다. 고건이라는 사람은
"Time 지는 인류의 조상에 대한 특집을 마감하며 이 분야를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주장은 사실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한낱 상상에 불과하다.'"
라고 인용부호까지 사용해서 썼는데, 실제 원문의 마지막 문장은 전혀 다르다.
"The only certainty in this data-poor, imagination-rich, endlessly fascinating field is that there are plenty of surprises left to come."
데이터는 부족하고 상상력이 넘치는, 이 끝없이 매력적인 (인류 고고학) 분야에서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앞으로 엄청난 놀라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사 전체를 고려해서 해석하면, 부족한 화석증거로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가설들이 제시된 상태에서, 앞으로 발견될 더 많은 화석들로 어떤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질지 정말 흥미진진한 인류 고고학이라는 의미이다. 도대체 진화론을 어디에서 모욕했나? 겨우 "data-poor, imagination-rich" 부분으로 그렇게 부풀렸나? 영어를 그렇게 해석하나? 이런 것을 한국어로 '망상'이라고 한다.
참고로, 타임지 결론처럼 실제 현재 2010년까지 여러 가지 다양한 화석들이 계속 발견되어 20여 종이 넘는 중간단계 화석들로 인류의 진화연구는 지금 엄청나게 재미있고 흥미로운 상태이다. 중간화석이 너무 많아서 과학자들은 머리를 싸매고 있다지만 지켜보는 우리 비전문가로서는 그냥 흥미롭고 신기할 뿐이다. 역시 타임지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이제 다시, 고건이라는 사람의 의기양양한 결론 문장을 보자.
타임지에서 모욕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항의하면 되나요? 타임지 기사를 실제 읽은 분이 계시다면, 정말 교만하고 가증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나이도 많으신 것 같은데, 서울대 교수라고 그러시는데, 이렇게까지 사악하게 변질된 글을 쓸 수 있다니 정말 사이비과학의 광신성은 놀랍다. 아니면 창조과학회에서 멋대로 창작해서 소설을 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지고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생략했지만, 창조과학회에서는 같은 호의 다른 기사를 인용한 것 같다는 의견도 있어서 내용을 추가한다. 정답을 말하자면 역시 기사를 인용한 게 아니라 그냥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소재를 빌려왔을 뿐이다. 역시 타임지의 주장은 그 어느 것도 인용하지 않았다.
이건 고건교수가 결론을 인용한 '표지기사'가 아니다. 인간의 진화를 다룬 것도 아니고 그냥 '네안데트랄인'에 대해서 따로 다룬 보조적인 기사이다. 고건 교수가 인용부호까지 써서 강조한 마지막 문장인 '현재로서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 한낱 상상에 불과하다.'와 비슷한 문장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이 네안데르탈인 기사에서도 타임지는 전혀 진화론을 모독하지 않았다. 기껏 인용한 것은 블란서 과학자 Boule의 잘못된 초창기 분석 사례 에피소드 한 부분 뿐이다. 결국, 고건교수는 (홈페이지 분량으로) 7페이지짜리 표지기사에 2페이지짜리 네안데르탈인 기사를 추가해도, 두 기사 모두에서 아무 주장도 인용하지 않았다. 이건 고건 교수와 창조과학회가 더 엉터리라는 사실을 강조할 뿐이다.
사실은 여기에서 고건교수가 이런 '단순한 소재 빌리기'를 타임지 주장 인용이라고 부풀려서 무리한 거짓말을 하는데, 왜 하필 네안데르탈인으로 했는지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과학의 기본개념이 전혀 잡혀있지 않을 때 빠지는 함정이다. 이것은 따로 정리해 봤다. 왜 네안데르탈인에 매달렸는지, 왜 필트다운인을 언급했는지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이다.
위에 링크한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과학 교사들이 수업 교보재로 사용할 만한 자료를 추천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다음 링크에 있다. 미국의 Howard Hughes Medical Institute 에서 만든 'BioInteractive' 페이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과학교육용 자료인데, 중고등학생 수준이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진화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중에 예를 들어 준 동영상은 '적자생존: 자연 선택과 적응' 이라는 제목의 페이지다.
다음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하기 바란다. 대략 10분 30초 가량 되는 짧은 동영상이며, 영어듣기 잘 안되는 분들은 자막을 켜고 들으면 된다. (영상화면의 오른쪽 아래 부분에 자막 표시 버튼을 클릭하면 된다.)
이 동영상에서는 털색깔이 어두운 바위주머니쥐(rock pocket mouse; 유대류 주머니쥐와는 다른 종류)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통상적인 야생 바위주머니쥐는 비교적 밝은 털색깔을 갖고 있다.) 하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자연 선택에 의한 바위주머니쥐 털색깔의 진화를 설명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바위가 어두운 색깔인 지역에서 10만 마리 중 한 마리라도 포식자에 의해 발견되기 어려운 어두운 털색깔의 변이가 발생하면, 이것이 조금만 생존에 유리해도 매우 빠른 기간 내에 결국은 전체 군집 내에서 그 변이를 가진 개체들이 다수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1%의 털색깔이 어두운 쥐가 생겨서 이로 인해 1%만 생존에 유리해도, 1000년 지나면 어두운 털색깔의 쥐가 전체 군집의 95% 를 차지하게 된다고 한다. 10% 유리하면 100년이면 된다.
즉, 우연히 생긴 변이가 서식지의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할 경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변이된 형질의 발현 빈도가 결국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와중에 포식자는 위쪽에서 보고 공격하기 때문에 배는 어두운 색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 배의 털색깔이 흰색인 쥐들도 등이 어두운 색이면 많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양념으로 첨가한다. 자연 선택에 의해 생존에 불리한 "모든" 형질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재현이 가능하다!
전혀 다른 지역의 바위주머니쥐 군집을 조사한 결과, 땅색깔이 어두운 지역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털색깔이 어두운 쥐들을 조사한 결과, _전혀 다른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인해 같은 결과(비슷한 정도의 어두운 털색깔)가 나타난 것_이다.
결론적으로, 진화는 결코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무작위적인 과정이 아니다. 다만 진화에는 "돌연변이"라는 무작위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자연 선택"이라는 선택적 방향성을 가진 요소에 의해 그 돌연변이로 인해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승자와 그렇지 못한 패자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변이와 선택이 진화의 모든 요소는 아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그밖에 이 블로그 포스팅에서 링크해준 BioInteractive 페이지는 '네 발 동물의 기원' 을 다루면서 진화적 종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중간화석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 대략 17분 30초 가량의 동영상이며 유튜브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http://www.hhmi.org/biointeractive/great-transitions-origin-tetrapods
이 동영상, 상당히 이해하기 쉽고 내용도 재미있다. 일단 흥미유발부터가 중요한데, 초반에서 사지를 갖고 있는 모든 동물들의 팔다리날개의 뼈들이 동일한 패턴(한줄-두줄-여러조각-손)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부터 시작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ㅋㅋ)
]]>2015년 5월에 미국의 교육방송인 PBS에서 진화에 대한 오개념들에 대해 정리한 기사. (1부) (2부)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의 악영향 중에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안티과학의 전파이며, 반면 당장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교육계를 서서히 좀먹고 있는 것은 진화에 대한 오개념의 전파이다. 그중 대표적인 오개념은 다음과 같다.
진화는 단지 '적응' 또는 '적자생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군 내에서 유전되는 변이의 축적으로 인해 생기는 모든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자신은 어떠어떠한 부류의 사람이다" 라는 믿음을 가집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올바른 테스트일까요?
사실 제대로된 테스트의 경우는 그 내용이 비밀로 부쳐져 있습니다.
이게 윤리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또한 이게 대중에 공개될시 테스트의 효과가 대단히 떨어지기 때문이죠.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지적받는 잉크반점 테스트 (로르샤흐 테스트 같은) 가 유출되었을때도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과연 그토록 정확하다는 테스트가 인터넷 블로그 따위에 돌아다닌다는게 상식적으로 가능할까요?
진짜라면 상당한 액수의 소송을 당하게 되는걸 감수하고서 말입니다.
신빙성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 보자면, 이런 테스트같은 경우는 바넘효과에 의해 믿게 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바넘효과에 대해서는 혈액형 성격설 글에서 이미 설명해보았으니, 여기선 넘어가도록 하지요.
요점은 심리테스트랍시고 돌아다니는 것들이 장난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런 종류의 기만에 의해 다른사람을 함부로 어떤 유형이다라고 판단하게 될 수도 있죠.
결국 인터넷에 나돌아다니는 이런 류의 "테스트"는 아무 의미 없는 낚시질 따위거나 잘 해봐야 약발 다 떨어진 테스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싶다면 가까운 대학교의 연구실에서 테스트를 받아보는게 어떨까요?
]]>먼저 PESM이란게 뭔지 들어보죠. PESM은 [Personnes Encombrées de Surefficience Mentale]의 약자로,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끊임없이 솟구쳐서 일상생활이 힘든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저자는 ADHD나 양극성장애, 조현병등이 사실은 PESM이며, 이러한 사람들을 환자취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PESM이란게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보죠. 가장 먼저 한 일은, PESM이라는게 확인된 증후군인지 찾아보는 일입니다. 최신판인 DSM-5 기준으로 봤을때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DSM-5가 나온지 3년 되었고, PESM이 DSM-5 이후에 나왔을 수 있으므로 PESM을 주제로한 논문을 2012년부터 검색해보았지만, 여전히 나오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PESM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것은 거의 확실한데, PESM이 실재할 가능성에 대해서 논해보죠.
과연 PESM은 존재하는가?
일단 위에서 언급된 정신장애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보죠. 조현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유전자에 의한 되물림과 신경전달물질같은 뇌내 화학신호의 이상을 꼽고 있습니다. 특히 신경전달물질 부분에서는 "도파민 가설"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는데, 이는 뇌에서 특정 뉴론들이 도파민을 너무 많이, 자주 분비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2]. 이러한 도파민 뉴론이 주의력과 집중에 부분을 차지하는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상당히 널리 퍼진 가설이죠. 꾸준한 약물 복용과 치료로 정상생활이 가능하도록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양극성장애의 경우에는 리튬이라는 약물을 사용해서 치료를 합니다. 이 약물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 치료제인데, 연구결과에 따르면 60%의 환자들의 manic episode 증상이 확연히 줄어들었다고 하는군요. 이 manic episode라는건 PESM 증상에 가장 가까운 증상으로써, 생각의 폭주나 급격한 기분변화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양극성 장애를 유발하는 요소로는, 뇌 구조의 변화, 신경전달물질의 이상등이 꼽히죠.
살펴보면 양극성장애와 조현병사이의 접점이 크지 않습니다. 공통점을 꼽자면 도파민이 있는데, 학자들은 아마 도파민 시스템의 이상이 비정상적인 현실감각이나 무질서한 생각등에 영향을 끼치는게 아닐까 보고 있습니다. PESM은 위의 질병과도 별로 관련이 없어보이는군요. 그렇다면 PESM을 가진 사람은 영재일까요? 먼저 알아야 할것은, 조현병 환자 그룹의 대다수는 일반적으로 낮은 지능지수 통계를 보인다는겁니다. 물론 전부 그런것은 아니라 평균치 이상의 값을 보여주는 환자도 있죠 [3]. 반면에 양극성장애는 의견이 엇갈리는군요. 많은 연구는 양극성 장애 환자와 일반 대중간의 지능에 유의미한 차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연구는 양극성 장애와 높은 시험성적간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군요 [4]. 즉,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조현병/양극성 장애를 앓는 환자들이 특별히 일반인보다 유의미하게 지능지수가 높다고 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작가에 대해서
그렇다면 작가는 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이런 주장을 펼친걸까요? 프티콜랭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본인을 "Communication and Self improvement Trainer and Coach, Speaker and Writer"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5]. 일단 논문 퍼블리싱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없는것을 볼때 확실히 연구자는 아니며, 제대로 된 심리치료사라고 부르기에도 미묘합니다. 그렇다면 프티콜랭이 상담을 할때 어떤 접근법을 펼치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NLP와 에릭센 최면, 교류 분석과 Provocative Therapy라는 물건인데, 이 중 널리 인정받는 방식이 없다는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과학 기반의 현대 심리학에서는 거의 언급도 안될정도죠. 프티콜랭이 상담가일을 20년 넘게 해왔다는걸 감안하더라도 현대 심리학의 조류에 대단히 뒤쳐져 있습니다. 행동주의도 20세기 초반부터 대두되었고, 인지주의가 지난 반세기간 흥한걸 생각하면 그 많고 많은 방식중 왜 하필 검증되지도 않은 NLP나 최면등을 이용하는지는 큰 의문입니다. 특히 NLP를 공부했다는 점에서 신경과학과는 좀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 신경과학 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현대심리학과 거리가 멀다고 해야겠군요. 박사 학위는 분명히 없는 사람이고, 이사람이 학술적인 연구를 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웹페이지에서도 그냥 책 16권 썼다고만 홍보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사람이 정상적인 심리학과 과정을 밟았는지가 의심스럽다고밖에 할 수 없군요.
결론
PESM이 실재한다는 연구결과는 없습니다. 그 존재자체가 의문이고, 그 존재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제대로 된 심리학자도 아닌것으로 보여집니다. 자신이 PESM이라고 착각한 분들은 별일이 아니었거나, 혹은 치료를 요하는 심각한 상황에 처하신 분일겁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전자에 속하겠죠. 후자에 속하는 분들에게 말씀을 드리자면, 정신장애는 치료를 요하는 질병입니다. 단순히 전문성도 모르는 누군가가 쓴 책을 읽고 자신이 문제가 없다고 단정짓기 보다, 진짜 전문가에게 맡겨서 혹시 있을 위험을 방지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Reference [1] https://www.facebook.com/passionoil/posts/996855297016665 [2] https://www.sciencedaily.com/terms/dopamine_hypothesis_of_schizophrenia.htm [3] http://www.ncbi.nlm.nih.gov/pubmed/25752725 [4] http://psychcentral.com/lib/intelligence-linked-to-bipolar-disorder/ [5] http://www.christelpetitcollin.com/?section=accueil&language_utilisateur=en
]]>오늘은 한번 폭력성과 미디어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해보고 싶네요. 다들 한번쯤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에 물들면 난폭해진다"는 말을 들어봤으리라 짐작합니다. 과연 이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번 파헤쳐 보죠.
이쪽에서는 유명한, 알버트 반두라의 보보인형 실험이라는게 있습니다 (대문짝처럼 걸려있는 사진이 바로 반두라입니다). 반두라는 공격적 성향이 모방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을까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계획했죠. 내용 자체는 간단합니다.
1) 3세에서 6세 사이의 남자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을 모아서 그들의 공격적 성향을 테스트 합니다. 이는 뒤에 있을 실험이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2) 이 아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눕니다. 한 그룹에게는 "보보 인형"이라는 큰 오뚜기 인형을 상대로 때리고 발로 차는등의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두번째 그룹에게는 보보인형을 무시하고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공격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앞의 두 그룹을 다시 각각 반으로 나누어서 같은 성별의 어른과 다른 성별의 어른의 공격적인/공격적이지 않은 행동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세번째 그룹에게는 아무런 모습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3) 이후, 아이들을 방안으로 들여보내서 이들이 어떠한 행동을 보이는가를 관찰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서, 반두라는 공격적인 행동에 노출된 아이는 그 공격성을 담습하여 표출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실험 결과에 따르면, 아이들은 a) 같은 성별의 성인이 b)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때 가장 공격적인 행동이 많이 관찰되었다고 합니다. 여성이 공격적 행동을 보일때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보다 더 공격성을 표출했고, 남성이 공격적인 행동을 보일경우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보다 더 폭력적 모습을 보였다는 거죠. 놀라운건, 공격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인 그룹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그룹보다 덜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만 봤을때, 많은 분들은 '그렇다면 당장 우리 사회에서 폭력적인 미디어 매체를 모두 없애야 하는것 아닌가요?'라고 생각 하실겁니다. 하지만, 위 실험은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습니다.
1) 아이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게 장기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반두라는 아이들의 공격성을 성인이 보여준 행동 바로 이후에 측정했습니다. 즉, 단기적으로는 공격성이 올라갈 수 있으나, 이게 지속된다고 보기 힘듭니다.
2) 3-6세의 나이대의 아이들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안됩니다. 즉, 이 발달단계에선 "이런 행동을 실제로 해서는 안돼"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죠. 폭력성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 나이이고요. 또한, 유전자에 의한 공격성의 차이에 대해서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3) 어떤 학자들은 아이들이 공격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어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공격성을 모방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보여준 공격적인 행동은 실제로 공격성의 표출이 아니라, 어른의 행동을 "가이드"로 보고 '이렇게 하면 어른들이 좋아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행했다는 거죠.
4) 실제 사회환경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위 실험은 대상자가 백인 아이들 위주였습니다. 낮은 경제력과 지위를 가진 흑인 및 타 인종은 범위 바깥에 있었죠. 또한, 실질적으로 아이가 행동을 습득하는 대상(model)은 보통 아버지나 어머니같은 가정의 구성원입니다. 아이는 이러한 대상과 상호 작용을 통해서 많은것을 배우지요. 하지만 실험은 이러한 면을 무시했습니다. 이러한 편향적인 설정때문에 실제 환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한계를 Low ecological validity라고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디어에 의해 아이들의 폭력적 행동이 증가한다는 말 자체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행동의 습득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일 뿐이며, 가정과 가까운 주위 환경에서 습득하는 공격성에 비하면 별거 아닌 수준입니다. 부모님들은 당장 비난하기 쉬운 미디어 매체에 따지기보다, 자신이 자식들에게 행한 폭력적 행동과 학교에서 받는 체벌등의 폭력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가져보는게 어떨까요? 아이들이 행동과 사고방식을 가장 많이 모방하는 대상은 바로 부모라는걸 명심하고서 말입니다.
]]>얼마전 환공포증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읽었습니다. 내용에 따르면, 많은 일반인들이 이 공포증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으며, 약 18%의 여성과 11% 남성이 공포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18% 라면 상당수가 이 질병을 앓고 있다는 뜻인데, 놀랍게도 이토록 심각해보이는 정신병은 DSM – 5, 그러니까 정신질환 진단및 통계 편람 최신판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정신과 의사들이 직무유기라도 하는걸까요?
먼저 이 메뉴얼의 공포증에 대한 진단을 살펴봅시다. 기본적으로, 공포증을 진단받으려면 두려워하는 구체적인 물체나 상황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공포의 대상을 피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 문제를 일으킬만큼 비이성적이고 심각한 두려움이 있어야 하고, 이 대상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인 패닉등의 불안장애를 동반하게 됩니다. 이 모든게 약 6개월 이상의 지속성을 띄고있어야 하고요.
자신이 만약 환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셨다면, 그리고 이 글을 다 읽으셨다면, 아마 본인이 그러한 공포증 환자라는 착각을 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밥 사진을 올려놓은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위 사진에는 수많은 둥글둥글한 밥알이 모여서 뭉쳐있습니다. 환공포증이 실재하는 공포증이었다면 아마 이 글을 보기도 전에 사진을 보고 패닉해서 부들부들 떨고 엉엉 울면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겠죠. 아니, 그전에 일상생활에서 밥은 어떻게 먹고 다녔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과장된것 같나요? 실제로 어린 아이를 데리고 운전하던 여성이 거미를 보고 공포에 질려서 달리던 차에서 뛰어내리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차는 아이가 그대로 있는채로 다른곳에 박아버렸고요. 다행히 아이나 어른 둘 다 무사했습니다만 그 여성은 여러 죄목으로 기소당했습니다. 그런데 거미공포증을 실제로 앓고 있다는 진단에 무죄판결을 받았죠. 공포증이란게 이렇게 앞뒤 안가리고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할만큼 심각한 질환입니다. 그냥 가볍게 “아 조금 소름돋네” 정도는 공포증 비슷한것도 아니예요. 그런 정도로 공포증이 됬으면 세상에 정신병자 아닌 사람이 없으며, 저는 고민할 필요없이 임상심리를 선택해서 환자 수백명씩 받으며 부자가 되겠죠.
애초에 환공포증 테스트 사진이라고 돌아다니는 대부분은 누가 봐도 혐오감을 느끼도록 보이는 사진이더군요. 솔직히 고층빌딩 옥상에서 난간위에 올라서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흐르며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대다수일겁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는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높은곳에서 안전장치 없이 나오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거든요. 환공포증도 당연한 반응을 이용해서 뭔가 무시무시해보이는 이름을 붙인거죠. 뭐 세상 어딘가에 진짜 공포증 수준으로 땡땡이 넥타이만 봐도 패닉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수준이라면 이미 인터넷에서 "아, 난 환공포증이 있어"라고 댓글을 달고 있을 상태가 아닙니다.
]]>과학계에서 수많은 논쟁들이 있을때, 편견을 갖지 않고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맞는 말이며, 양쪽의 주장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뉴런 이론(Santiago Ramon y Cajal의 이론)과 신경망 이론(Camilo Golgi의 이론)의 경우 과학계에서 상당한 논쟁이 있었고, 결국 뉴런이 발견되면서 뉴런 이론쪽으로 대부분의 주장은 기울었습니다. 다만, 후의 신경세포들의 시넵스 연구를 통해 신경망이론도 단지 뉴런이론과 대립하는 것이 아닌, 또다른 의미로 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논쟁을 진행하는 것은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있는 과학자들이며, 서로의 발견에 대한 수많은 논문들을 통해 진행이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과학의 가장 기본중 기본은 치우침이나 편견 없이 열린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그것은 그 주장들이 어느정도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때이고, 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최소한 논문을 써서 피어리뷰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고, 상대가 가져오는 데이터를 신뢰하면서 상호간에 논쟁을 주고 받는 것이 과학의 방식이죠. 반면에, 이미 이런 과정을 통해 과학계에서 이미 결론이 났거나, 더이상 논쟁중이지 않은 사안들, 예를 들자면 진화라던가, 기후변화와 같은 것들은 이런 수많은 논쟁과정과 검증을 통과한 상태로서 사실상 이미 결론이 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를 뒤집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까지 저기에 관한 모든 논문을 읽고, 그 결과를 뒤집을만한 논문을 내야 하겠죠.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이런 과학계의 방식을 이해한다면 과학계의 입장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 상황인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만큼 전문가들이 논쟁하고, 서로 비판해서 얻어낸 결과니까요. 물론 어떤면에서, 일반인들이 과학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tool같은 것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한 교육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이해를 하지 못하고 한 방향에 입장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모른다"라는 점을 전제하고, 이런 모든 발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겠죠. 그러므로 이 분야 전문가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어떤 연구를 했는지를 신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양비론은 이를 거부하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 생각 가운데에는 "내가 전문가보다 많이 알 수도 있어!"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베이스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유사과학을 같은 높이에 놓고 "양쪽"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의사의 처방과 지하철 약장수의 만병통치약을 같은 위치에 놓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상 여기서 두개의 "입장"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으며, 전문가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현재 진화나 기후변화에 대해서 과학계의 생각이 두개로 쪼개지거나 대립되거나 하지 않고, 95~98%의 과학자는 이점에 동의합니다. 이는 과학계의 입장을 분명히 나타내줍니다. 그 "과학계의 입장"이라는 것 자체가, 그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서로 비판해가며 이른 현재의 합의이기에 의미가 있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합의를 이루기까지의 전문적 토론을 논문이라는 방식을 통해 계속 진행해야 하는데, 그정도 수준이 되지도 않는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다가갑니다. 이들의 최초 소스는 대부분 뉴스 기사나 유투브 등의 그다지 믿을만한 소스가 되지 못하는 것들 뿐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이런 것들에 대한 의문이 있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논문부터 써야 하고, 그만큼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논의로 끌어올려야 할텐데, 지금 대중을 대상으로만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사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양비론의 경우 이런 믿을 수 있는 소스와 믿을 수 없는 소스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서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과학 자체에서는 모든 주장에서 열린 마음을 갖고, 편견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이것은 자신이 그것을 판단할 자격이 있을 때의 문제입니다. 아침 축구회에 가끔 나가는 아저씨가 전문 축구 감독에게 전술이 문제가 있다고 훈수를 두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비슷합니다. 제가 박사과정을 통해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은 "모르는 것"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 지식을 갖지 않았다면, 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므로 95-97%의 과학자들이, 그리고 과학계가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는지를 NCSE 혹은 실제 리뷰 논문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스켑티즈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기에 이를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본인의 힘으로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알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추천합니다.
(1) 모든 주장에 대한 원본 소스를 찾아보십시오. 실제 연구 논문이 있다면 그것을 읽어봐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자기네들 주장일 수밖에 없거든요.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유투브가 첫 소스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학술 논문의 경우 다양한 상호 비판을 통해 출판되므로 그 내용은 기사나 유투브에 비해 몇십배는 믿을만 합니다. 애초에 대부분의 기사들은 논문의 일부분을 토대로 해서 기자들이 쓰는 경우가 많아서 많은 경우 실수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유투브 영상이나 기사에 나오는, 과학계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전공을 찾아보십시오. 대부분의 경우 생물학, 혹은 기상학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그들도 이 분야에 대한 비전문가라는 것이고, 그들의 PhD 역시 이 발언에 대하서는 전혀 전문성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한 그들이 쓴 논문들이 최근까지 얼마나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최근에 쓴 논문이 정말 그들의 발언과 일치하는지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도 없이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아무런 전문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3) 내 머릿속에 이해된다고 해서 그게 맞는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창조설자들이나 온난화 부정하는 자들은 정말 알아듣기 쉽게 축소시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만들어서 혼란을 주고, 그 혼란을 틈타서 그들의 거짓말을 전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내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라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유투브와 같은 곳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과학자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이건 뭔가 잘못됬다"따위의 소리를 할때, 생각해보십시오. 과학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당신보다 이 분야에 관해 전문가이고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단순한 의심같은건 하루에 수십번 해보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그들이 아는 것을 전부 알기 위해선 그 분야 PhD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과학계에 대한 음모론은 말 그대로 "전부" 거짓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5) 만약 잘 구분이 안된다면, 왜 이 사람들은 과학계에 가서 이야기를 안 하고 대중에게 와서 이야기하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과학자들은 과학자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전문적 용어에 대한 이해가 있기에 대화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Camilo Golgi와 Ramon y Cajal은 사제지간이기도 했고, 그랬음에도 끊임없이 논쟁했습니다. 과학계에서 정말 옳다고 생각되면 먼저 과학계에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하고 대중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의심해보시기 바랍니다.
양비론에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판단능력이 떨어졌다는 신호이자, 스스로 점검해봐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보화 시대에 넘쳐나는 쓰레기 정보들 때문에 누구나 이런 혼란에 빠질 수 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혼란속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심리학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자주 듣는 말중 하나가 correlation ≠ causation입니다.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내용이죠. 두 변수 a와 b 사이에 의미있는 관계가 있는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게 a가 b에 영향을 줘서 증가하는건지, 아니면 제 3의 변수인 c가 a와 b에 영향을 끼쳐서 둘 다 증가하는 건지 단순한 그래프로는 모른다는거죠. 상관관계는 단순히 두 변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면, 인과관계는 좀 더 복잡합니다. 한 변수가 다른 변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근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흔한 예시가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의 판매량이 증가할 때, 익사자의 수 또한 증가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확실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아이스크림을 먹었기에 익사했다”라고 주장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도 안된다는걸 바로 알겠죠.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높은 온도라는 제 3의 변수가 영향을 미친다는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판매량과 익사자의 수 사이에는 상관관계는 있으나, 인과관계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숙지하고 난 후에 기사를 읽어보면 새로운 느낌이 날 겁니다. 연구자들은 잘못한게 없어요. 사실 인과관계를 밝히는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학자들은 실험결과에 대해서 조심스럽고, 무언가를 증명했다던지 하는 확신하는 투의 단어를 거의 안씁니다. 특히 사회과학에서 그러한 경향이 크죠. 왜냐하면 자연과학에 비해서 정밀한 실험 설정이 어렵고, 항상 예상치 못한 변수가 존재 가능하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과학은 일반적으로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해가는 과정, 그리고 분석을 통해 그 가설의 타당성을 기반으로 반증하거나, 혹은 입증하게 되는 과정의 전부를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과학은 역동적이고, 변화가 가능한 것이 기본적입니다. 이렇게 검증이 충분히 진행되고, 내용상의 합의가 이루어 질 경우, 이것은 이론이 되며, 관찰가능한 데이터의 영역에 들어갈 경우, "자연현상"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진화학과 세포학이 과학의 기초가 될때까지의 검증의 과정을 보았습니다.
창조과학이 과학이라면, 창조설을 하나의 가설로 설정하고, 이를 증명할수 있어야 하며, 반대로 틀릴 경우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창조설은 이미 많은 부분이 말이 안되며, 단 하나의 증거도 없고,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 전부가 너무나 주관적인, 비과학적인 것들 뿐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이들이 진화를 비롯한 사실들을 억지로 공격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의미없이 거짓말 하는 것밖에는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창조설을 기각해버리면 창조과학을 과학이라 인정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조설은 "틀린 가설"정도로 그냥 남게 될 테니까요. 일반적으로 이러한 과학의 방법론을 따르지 않고 반증조차 불가능한 창조과학은 과학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렇기에 기각조차 불가능해지는 것이죠. 만약 여기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합리성의 잣대를 들이대면 너무나 쉽게 기각되어버리는 것이 창조설입니다.
그러므로 답은 간단합니다.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닌 것입니다.
창조과학은 창세기를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황당한 시도입니다. 그들의 홈페이지에는 창조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 창조의 증거를 찾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건은 애초에 증거가 없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만큼 자기들의 믿음이 연약함을 역으로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과학의 시험대위에 올리겠다는 것으로, 과학의 기초인 "잠정성"을 생각하면 매우 위험한 시도인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창조과학 자체는 그리고 사실 아주 위선적인 행동입니다. 창세기를 문자대로 믿는다고 그들은 주장하지만, 이것은 동일하게 적용하면 지동설을 거부해야 하고(시편 19:5~6, 104:5 여호수아 10장 12절), 눈창고 우박창고를 믿어야 하는 것(욥기 38:22)인데, 그들은 그러지는 않으면서 성경을 제멋대로 특정 부분만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억지를 쓰는 것에 불과합니다. 거기다가 그들은 스스로가 근본주의자라 칭하는데, 이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창조과학의 "근본"은 제7일 안식교 교주인 앨런 화이트의 꿈에서 나온 것이며, 반진화론 관련 주장은 대부분 통일교의 그것을 가져온 것이다. 이로 인해 창조과학회는 통일교 집단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잇습니다. 그야말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즉,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다면 창조과학은 당연히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모든 반진화론적 생각을 포함하며, 결론적으로 지동설을 받아들이고 눈창고 우박창고가 없음을 이야기함에도 진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주 모순적인 창조설자들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즉 창조과학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으며 굳이 신앙으로 구분하자면 광신혹은 맹신정도에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과학은 사실상 "유사과학"에 속합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혈액형 성격설이나, 물은 답을 알고 있다같은 노답인 거짓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과 창조과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혈액형 성격설이나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등의 주장때문에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창조과학에 비해 적으며, 이들의 주장은 창조과학의 주장에 비해 고쳐지기가 쉬운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약간의 과학적 지식만 있어도 사기꾼들을 욕하는 것은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유사과학들도 배격해야 할 것이지만, 창조과학은 심각한 사회문제인 반이성적 사고를 만들어내는 더 큰 문제점을 일으킵니다. 심지어는 이것이 신앙이라고 주장을 함으로서 창조과학회의 사기꾼들을 유명해지게 만드는 것으로서 확산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의 가장 심각한 부분은 바로 그들이 "진화"라는 단어에 대해 이유없는 분노를 갖게 만듦과 동시에,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으려하고, 사고를 경직시키며, 이 분야에 대해서만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착각은 창조과학과 함께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게 됩니다. 즉, 창조과학은 단순한 유사과학이 아닌, 매우 악질 유사과학으로 다르게 분류해야 할 것입니다. 즉 창조과학은 유사과학조차 될 자격이 없는 것이죠.
창조과학은 그럼 어디에 속해야 할까요? 과학도, 신앙도, 심지어 일반적인 유사과학도 아닌 것인데 말이죠. 올바른 답은 바로 "사기질"이라는 것입니다. 창조과학회의 중심 세력은 사기꾼들입니. 돈을 벌기 위해서 자기의 학자의 양심을 포기하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때때로는 돈이 아닌, 학계에서 받지못한 인정을 받기 위한 행동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자기의 주장에 대한 자존심때문에 멈추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창조과학회에서 주장하는 모든 "증거"라는 것들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충격적일 정도로 논문의 내용을 곡해하고, 기존 논문에 없는 내용을 삽입하는 등, 심각하리만큼 진실인 글을 단 하나도 찾아내기 힘든, 거짓말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거짓을 다 들어냈을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들은 "사기질"이라고 부릅니다.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기가 거짓말에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자기도 모르게 더 거짓말을 하게 되고, 이런 자존심을 축으로 해서 사기질은 점점 사람들을 잠식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창조과학에 의해 교회들이 잠식되면서, 진실이 사라진 현재의 수많은 교회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들중 모든 것에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이런점은 더 심하게 작용합니다. 심지어 그들의 지식수준에서 진화학을 비롯한 전문화된 과학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창조과학은 이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보이는 완전히 잘못된 가짜 상식을 전파함으로서 이런 사람들이 "있어보이게"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배운 사람들에게 이런 가짜 전문가들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창조과학은 사기질인 것이죠.
일부 창조설자들은 이런 창조과학의 잘못된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창조과학의 "순기능"이 있으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주장한다라고 자신을 합리화 합니다. 한 창조과학계열의 유명한 사기꾼이자, 강연자의 강의를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처음에 "제가 예수님의 기적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은 믿을만한 이유나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며 본인이 과학적인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과학자들이 발견한 증거에 대해 공격합니다. 딱 여기까지 들으면, 과학자들은 이사람이 광신도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말과 "과학적 증명"이란 말을 강제로 구분하는 그의 행동은 일종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우선 이사람은 재료공학과를 나왔다는 것이 진짜라는 가정하에 과학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과학은 반증이 가능한 것으로 항상 이전의 이론을 다 갈아엎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뉴턴의 정의가 그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양자역학에 대치되었던 것만)도 그랬죠. 과학은 그만큼 유연하고, 증명과 증거들, 그리고 논리적 타당성이 중요한 학문이며, 모든 가설과 가정, 학설과 이론은 "이것도 틀릴 수 있다"라는 가정을 반드시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창조과학은 여기서 우선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과학으로 증명하겠다? 자 신앙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면, 그것을 과학으로 테스트한다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가정을 하고 테스트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딱 1가지 반증만 나와도, 창조는 사실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창조과학은 이렇게 성경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과학의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 행위로 과학계의 권위와 뛰어난 설명 능력을 사용해 사람들을 현혹하지만, 이는 시작부터 교만이고, 그 방식은 사기질이며, 그 결과는 자존심에 물든 광신도 양성이라는.. 백해 무익한 결론으로 치닫게 됩니다.
자 창조과학이 기독교에 가져온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해보겠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람세스"에 보면 "오피르"라는 작자가 모세에게 "하나님의 기적을 우리가 도와야 한다"면서 독살과 같은 방법등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는 나중에 들통이 나서 진짜 기적의 색마저 바래게 되는 결과가 이 소설에는 나오죠. 즉, 그들이 만약 진짜 과학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들이 믿음을 과학의 시험대 위에 올리는 그 행위는 기독교 자체가 가진 "창조"의 원의미마저 무색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진짜 과학을 사용하지 않고 사이비 과학을 사용하게 됨으로서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지죠. =>결과: 신앙의 약화
창조과학회의 주장: 진화론과 함께 시작된 무신론적 세계관에 대항하고자 하는 목적? 사회적 진화론은 진화론과 아무 관련 없는, 진화론을 제대로 못 이해한 사람들이 만든 사상에 불과하며, 사회적 진화론을 이용해먹은 히틀러 같은 사람들은 성경 역시 악용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진화론은 무신론적 세계관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다윈 자신의 믿음이 무신론자였다고 해서, 그의 과학을 공격하는 행위도 잘못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러면 이세상 모든 무신론이었거나 그런 과학자들의 과학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꼴이 될 뿐이니까요. 진화론은 가치중립적인 과학이며, 과학은 어떤 세계관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과학은 끊임없는 탐구와 진실을 찾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이런 반응은 실제 무신론적 세계관에 힘을 실어주게 되는데, 교회가 창조과학회의 비과학적 방법을 싸고 돎으로서 "교회 가면 바보됨"의 생각을 널리 퍼뜨리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에 접근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과: 무신론적 세계관에 힘을 실어줌
창조과학회의 주장: 진화론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오늘, 창조론에 대한 이해를 증가하고자 하는 목적? 우선 진화론은 과학이므로, 창조 자체와 대립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창조는 신앙적 부분으로서 그 방법에 대해서는 모른다는게 답이니까요. 그들이 만들어낸 창조"설"은 이미 성경과 너무 많이 달라져버린데다가, 자기 맘대로 때려맞추는 짓을 해서 결국 성경마저 왜곡합니다. =>결과: 성경 왜곡 및 거짓 주장
창조과학회의 순기능은 정말 기독교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결론적으로 악한 결론으로만 이어집니다.
과학의 권위를 탐내다가 신앙 약화를 가져왔으며, 과학을 적대시 함으로서 반신론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고, 명백한 사실로 밝혀진 진화를 포함한 사실들을 외면함으로서 성경마저 왜곡하고 그 외의 각종 거짓 주장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거짓에 기반한 다른 주장을 통해 Crank Magnetism으로 끌어들임으로서 교회와 사이비과학 및 음모론과 결탁하게 만들었습니다.
우스개소리이지만 그나마 유일한 순기능이라 할 만한 것은 사실 과학계쪽에게 있습니다. 이는 창조과학회가 대중들을 세뇌시키고 교과서를 바꾼다는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지르자 서로 경쟁만 하던 과학계에서 창조과학 같은 가짜 사이비 과학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쳐 노력하기도 하는 훈훈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창조과학은 백해무익한 존재로, 사라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것중 하나입니다. 사회를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 후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창조과학은 우리 모두의 손으로 소멸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 그들은 다음의 뉴스를 링크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와서, DNA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이 후성유전학이라는 식으로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후성유전학에 대한 설명은 틀리지 않으며, 사이토신의 Methylation이나 Histone modification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입니다. 여기서 Korizol이 새롭게 알아낸 A Methylation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으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스스로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사실 창조과학회에서 주장하는 "고도의 복합성"에 대한 주장은 이미 여기서 깨진 바 있습니다. 이는 뉴스의 표현을 오역한 것으로 결코 단순히 복잡한 구조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발견한 것인 실제 연구의 내용을 과대해석 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다음에서 창조과학회에서 다음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이런 변화가 이전의 믿어졌던 것보다, DNA의 더 많은 변경이 사람, 쥐, 다른 척추동물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원 논문을 링크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크게 놓치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달려있는 원 논문이죠. A-Methylation(m6dA/dA) 패턴은 여기서 연구중인 제노퍼스 개구리와 쥐의 경우 0.00009%밖에 되지 않으며(Drosophila는 0.07% and 0.001%; C. elegans에서는 0.01%~0.4%; Chlamydomonas에서는0.4%이나 되는데 비해서), 물론 종간의 차이를 말하고는 있지만 일단 연구에 사용된 기관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개구리: testes, fat and oviduct, 쥐:kidney)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패턴은 쥐,개구리에서 다르다고 말한 부분조차도 사실이 아닙니다. 원 논문에서는 직접 이 동물들의 Genome Wide Comparison을 실시했다고 하며 엑손(코딩 부분)에서는 쥐와 개구리의 경우 발견이 되지 않는다고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 이 메틸화 패턴이 expression을 줄인다는 점이나, 적은 유전자와 연관이 있다는 말, 그리고 매우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창조과학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반대로 이 부분을 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것이 왜 "진화론의 예측과는 달리"인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진화의 과정을 연구하고, 직접 왜 이런 "차이점"들이 생겨나는지를 찾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진화와 연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차이가 나는 부분들의 이유를 찾다보면 차이가 만들어지는 곳에 도달하게 되어있고, 이전에 Human Accelerated Region(HAR)이 발견된 것처럼 진화의 방향에 대한 연구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화학은 모든 생명이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조상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점을 말합니다. 그 차이를 찾는 것은 진화의 예측과 "다른"것이 아니라,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힌트를 찾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잡성이 진화론에 반대된다는 주장은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창조과학의 거짓말은 원 논문을 읽어보면 이렇든 대부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과장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이 창조과학회의 맨 얼굴입니다.
Reference
Scientific Paper, 과학논문
Koziol, M. et al. 2016. Nature Structural & Molecular Biology. 23 (1): 24-30. Identification of methylated deoxyadenosines in vertebrates reveals diversity in DNA modifications
Non-Scientific Reference, 비과학 글
University of Cambridge News Epigenetic discovery suggests DNA modifications more diverse than previously thought.
]]>원문: http://kacr.or.kr/library/itemview.asp?no=6169 http://crev.info/2015/05/its-curtains-for-enceladus/
답변: 이는 해외 창조과학 사이트의 글을 번역해 온 것인데, 한국창조과학회의 인용부호가 이상하다. 한국창조과학회의 번역본은 "분명히 매우 많은 양의 물질들이 분출되고 있음"이 실제 Nature 논문에 있다고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창조과학회가 번역하기 전의 창조과학 글 원문에서는 분명히 주어만 인용을 해 온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해당 Nature 논문에서도 한국창조과학회가 제시한 인용구 전체는 찾아볼 수 없다. 애초에 "Nature 지의 논문은 명쾌하게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앞에서 서술하고 있고, 한국창조과학회가 제시한 인용구는 명쾌하게 언급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한국창조과학회가 번역한 문장은 자기모순적이다. 이는 영어 원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결국 한국창조과학회는 단순한 오타를 냈거나 의도적인 왜곡을 저지른 것이다. 만일 의도적인 왜곡이라면 마치 지들 주장이 해당 Nature 논문에 떡하니 적혀있는 것처럼 쌍따옴표 위치를 바꾼 것이다.
물론, 이런 의심만으로 창조설자의 주장을 논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창조설자들은 왜 실제 해당 논문에서는 자기들 주장의 반박이 나온다는 사실을 꼭꼭 숨기는 걸까? 쉽게 설명해서, 기존에 보였던 어마어마한 분출들은 약한 커튼형 분출들이 겹쳐 보여서 착시를 일으킨 결과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논문은 초록에서도 엔켈라두스 분출의 착시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러한 착시 현상을 밝혀낸 것이 이 저자들의 업적이다. 이는 분명히 엔켈라두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뒤집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설자들이 원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다. 기존의 어마어마한 제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과격하고 무시무시한 엔켈라두스 모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러한 어마어마한 제트가 고작 착시 현상에 불과했다면?
필자는 천체물리학 비전공자라 이 분야에 대해 문외한이다. 하지만 학계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 이 논문을 인용한 arXiv 논문을 찾아냈다. 이 arXiv 논문은 해당 Nature 논문과 다른 최신 연구결과들을 종합해서 엔켈라두스 분출이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오히려 '덜' 격렬해 보인다고 적고 있다. 관찰된 엔켈라두스 분출이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규모일 수 있다는 것도 계산해놨다.
창조설자의 글은 엔켈라두스의 45 억 년 분출에 대해 어떠한 계산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상식적으로 엔켈라두스가 오랜 시간 동안 분출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했어야 한다. 보통 드는 이유는 45억 년 동안 그러한 분출이 유지가 되는 메커니즘을 모른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면 최소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창조설자는 고작 무지에 의거한 논증이나 펼치고 있다. 그들이 항상 앵무새처럼 떠드는 것은 "내가 모르면 신이 했다"는 것이다.
]]>저널클럽이나 랩 미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논문 읽었다고 말하고 내용 이해 못하면 그 저널클럽의 거짓말쟁이는 바로 그 사람이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논문 안 읽었으니 내용을 설명해달라고 말하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요. 그래서 저널클럽 갈때는 반드시 논문을 읽어보고 가거나, 아니면 안 읽었다고 고백을 하고 알려는 자세가 있는 사람들만을 초대합니다. 사실상은 그래도 예의상 스킴이라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부분의 신문기사나 다른정보들은 논문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실수하는 기자들도 수두룩하고, 이른바 악마의 편집을 사용해서 인터뷰를 과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진짜 과학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면 논문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제가 배운, 쉽게 논문 읽는 법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다음 순서로 읽으면 빨리 이해할 수 있다고 저희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 물론 이것은 제가 읽는 방법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이 방법이 통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다양한 방법들을 존중합니다.
어느 논문이든 기본이지만 Abstract(초록)은 논문의 개략적인 내용을 나타냅니다. 물론 논문에 따라 초록이 모든 내용을 함축하는 경우도 있고, 너무 뼈대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으며, 뭔가 잘못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쓰여진 초록의 경우 내용을 함축해서 정리해 놓았기에 사실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이라면 초록만으로 대략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이거나, 초록이 잘 쓰여지지 않은 경우, 제한적인 길이만이 허용될 경우, 초록만으로는 전체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즉, 여기까지 읽는 것으론 논문을 읽었다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분야의 다른 사람의 방법론을 연구하거나, 시간이 부족할 경우에 많은 논문의 초록만을 대략 스킴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이를 논문을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창조설자들의 경우 여기까지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논문이 링크된 다른 기사를 보는 방식을 취하는 황당한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단 그림은 사람들이 글보다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많습니다. 즉, Figure을 이해하고, 그 Figure 내용을 분석해보다보면 대략의 뼈대가 완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로 메인 데이터와 실험 과정에 관련된 Figure이 많으므로 대략적으로 논문이 무슨 실험을 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부터 사람마다 갈리는 경향이 있는데, 글이 편하신 분들은 3으로 바로 넘어가시는 것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단지 Figure만을 보고 내용을 대부분 유추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지만, 같은 분야에 있을 경우에는 대체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논문을 읽었다고 말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상대의 방법론을 이해할 때나, 결정적인 데이터를 보고자 할때에는 여기까지만 읽는 사람도 있으며, 저널 클럽에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 때 일부 대학원생들이 여기까지 읽는 경우도 있...(으나 그랬다가 대부분 털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제 메인 논문을 읽을 차례입니다. 하나하나 단어에 집착하면 전체 내용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빠르게 한번 스킴하면서 대략적인 내용을 봅시다. 위에서 맞춘 뼈대와 비교하면서, 만약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경우 표시해둡시다. 스킴은 속독이며, 시간이 없을 때 빠르게 논문을 읽는 방법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대체로 저널클럽에 오는 사람들은 논문 전체를 스킴하고 오는 경우가 많으며, 같은 분야이거나 훈련이 많이 되어 있을 경우에 스킴만으로 전체 내용을 어느정도는 이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틀릴 수 있으므로 정독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들사이에 논란이 좀 있는데 저는 이 방법을 선호합니다. 그들 실험이 무엇인지 대충 알았으니, 결과를 읽는 것입니다. 이부분이 논문의 핵심이 되는 데이터에 해당하므로, 꼼꼼히 읽고, 위에서 표시한 부분들을 확인해서 연결된 Figure도 보면서 제대로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부분이 가장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부분입니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적어둡시다. 앞의 2와 3에서 읽은 것들과 잘 연결되는지 보는 것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즐거운 시간이 바로 Result를 정독할 때입니다.(이건 개인적 취향)
이제부터가 진짜 논문 읽기입니다. 앞에서 스킴하면서 표시해둔 부분과 Result를 읽으면서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을 다 정리해가면서 읽습니다. 4에서 Result를 읽긴 했지만, 다시 읽어보면서 자기가 읽은 내용이 맞는지 확인합시다. 때때로 아무리 정독을 해도 대체 Result가 왜 이렇게 나온건지 이해가 안될 때가 있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궁금증은 해소되게 됩니다. 이때에 이들의 Biological Question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고, 비슷한 분야를 연구할 경우 비판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가 논문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포인트입니다. 보통 대부분의 논문은 여기까지 읽으면 대부분의 논문의 내용을 매우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실 Method를 다 읽지 않는다 해도 이정도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정도는 이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Method를 읽으면서 그 방법의 디테일을 컨펌하고, 앞에서 잘못 이해했던 것들을 발견해서 그 섹션을 다시 읽어봅시다. 이부분은 자기의 분야에서 좀더 상대의 방법론을 이해하고 싶고, 상대의 protocol을 일부 도입하고 싶을 때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비니다. 마지막으로 Introduction이나 Discussion에 나온 이전의 연구나 이후 연구에 대한 Reference논문을 찾아 1부터 6까지 반복한다면, 이 분야에 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게 됩니다. 논문을 읽을 때 즐거운 부분은 바로 이렇게 Reference를 찾아가면서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발전해왔나 보는 부분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대략 논문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논문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처음으로 논문을 읽거나 자기 분야가 아닌 분야 논문을 읽을때, 매우 편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기 분야 논문의 경우 대략적인 스킴만으로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논문을 처음 읽을때는 시간이 오래(저는 거의 24시간이 걸렸습니다.)걸리고, 찾아볼 것도 많지만, 읽다보면 나름 빨리 읽는 요령이 생기게 되고, 이전에 쌓은 지식들이 이해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창조설자에게 이것을 알려준다고 해도 그들은 1도 안 하거나 1을 해놓고 자기가 논문의 내용을 다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며, 오류투성이인 신문기사를 끌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창조설자들에게 이거 알려줘봤자 걔넨 안 읽습니다.
]]>과학의 출발이 되는 발견은, 항상 과학자의 관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모든 과학자들은 모든 것을 중립적으로 보는 훈련을 받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사실일테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가설이 되고 이론이 되며 증명될때까지, 그 발견은 수많은 다른 과학자들에게 비판받고, 재검증되며, 다시 테스트되면서, 중립적인 것이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과학의 성과들은 여기에 존재하며, 이 이상으로 올라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발견이 자연계에서 관찰이 된다면, 이것은 더이상 이론이 아닌 관찰된 자연현상이자, '사실'이 되는 것이죠.
오늘은 생물학적 진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 명백한 사실로 규명되었는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설명하면서 이와 매우 비슷한 생물학의 또하나의 연구주제인 "세포"를 함께 보여드림으로서, 이 과정이 진화만이 아니라 다른 과학적 사실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네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진화에 대한 아이디어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비롯한, 자연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다윈과 윌리스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그전 과학계에서 존재하던 이런 아이디어와, 관찰된 사실들(비글호 탐험을 통해)을 토대로, 가설을 세웁니다. 그 당시에 유명한 자연선택"설"이었죠. 이러한 진화에 관한 가설은 다윈과 윌리스의 독립적인 관찰과 실험들을 통해서 증명되었지만, 포괄적이지 않았고, 그만큼이나 다양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증명된 가설"로 출발했습니다.
세포에 관한 아이디어 역시, 그당시에 존재하던 생물의 기본적 구성 단위가 존재한다는 아이디어에 영향을 받아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버트 훅은 식물의죽은 세포벽을 관찰한 것을 토대로, 세포라는 아이디어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슈반과 슐라이덴은 동물과 식물에서 각각 같은 관찰을 해서 확립된 것이죠. 역시 이것도 처음에는 가설로서 출발했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고, 화석을 비롯해 진화에 관한 여러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하자, 진화는 좀더 포괄적인 형태로 생명의 종분화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발전했습니다. 과학에서 이론이라는 것은 포괄적이며, 검증을 거쳐야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유전학의 발달이 부족했던 19~20세기 초반까지는 진화이론은 생명의 역사를 설명하는 증명된 이론으로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세포설은 현미경의 발달로 세포의 구성과 세포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이 좀더 탄탄해지면서, 모든 생명체가 세포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에 대한 포괄성과, 세포의 구성 요소에 대한 부분이 밝혀지면서부터, 세포설 역시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유전학 발달은, 진화론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들 정도로, 진화의 지금까지 나온 모든 증거들을 압도하는 최강의 증거인, 지놈 시퀀싱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사실상 기본적인 시퀀스 상동성만 보더라도, 지금껏 밝혀내온 진화론의 근거들과 계통수를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으며, 곧이어 나온 트랜스포존과 Accelerated Region의 발견은, 진화의 속도가 달라지는 것을 연구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라는 현상을 증명해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유전정보 증가의 관찰은 그중 하나로, 거의 항상 증가하는 유전정보에 대한 글은 이곳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20세기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진화를 의도적으로 일으키기도 하였고, 그로 인해서 진화라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실험/관찰된 증명된 이론으로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 과학자들은, 끊임없는 집념어린 관찰 끝에, 자연계에서 종분화 현상을 관찰하게 됨으로서, 진화라는 것은 더이상 단순히 이론이 아닌, 관찰된 사실 혹은 자연현상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미경의 발달로, 다양한 형태의 세포들이 관찰되었고, 전자 현미경까지 발명되면서, 세포내의 구조 하나하나까지 다 연구할 수 있게 되면서, 더이상 세포이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닌 "생명체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것은 사실로 관찰된 자연현상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진화와는 달리, 세포를 관찰하는 현상은 훨씬 빨랐으므로, 세포가 사실로 인정된 시점은 21세기에 오기도 전에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관찰된 사실인 진화, 그리고 세포는 이렇게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많이 다듬어졌지만, 이 둘다는 생물학의 기초학문인 것은 사실이며, 둘 모두 각자의 부분(생명의 역사와 생명의 구성 물질)에 관한 과학적 발견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 무엇이 진화의 속도를 결정하는지, 무엇이 진화의 방향을 형성하는 지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으며, 무엇이 세포의 형질을 변경시켜 암으로 만드는 지, 그리고 그 세포가 왜 갑자기 특정 Oncogene을 형성하게 되는지 등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알아낸 것들과 찾아낸 것들을 기반으로 진화 생물학과 세포 생물학이 형성되었고, 우리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배운 것들이 이런 기초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현재, 진화생물학과 세포생물학은 둘다 생물학의 가장 기초적인 학문이자, 모든 생물학의 기본이 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연구하는 뉴로사이언스 역시 이 두 분야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이 두 학문은 여기서 언급한 유전학과 함께 발전해가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점차 세분화가 되어서 현재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학문의 분야가 존재합니다.
실제로, 과학이 밝혀낸 것이 절대적이지 않은 경우는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지만, 실제로 그런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보는 "사실"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도, 그만큼 많은 교차검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타이핑을 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이것이 제가 타이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저를 조종해서 타이핑을 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으로 이를 분석한다면, 여기에서 관찰되는 사실들을 탐구(컴퓨터가 저를 조종할 수 있는 장치?)하고, 실험(다른 컴퓨터를 갖다줌)을 통해 이것이, 제가 타이핑을 친다는 것임을 보여주겠죠. 이는 역시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야기하는 사실보다 훨씬 더 믿을만한 "사실"인 것입니다.
진화가 사실인 이유는, 진화가 관찰되며, 실험적으로 증명되었고, 다 쌓으면 지구 몇십바퀴 돌만한 미친듯이 많은 증거들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조설자들은 아직도 진화가 무슨 가설인양 주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수준의 생각은 세포설이 가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야말로 원시적인 생각이며, 과학의 기본도 모르는 소리입니다. 창조설자가 만약 "과학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진화를 부정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세포설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부정해야 하고,뭐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본인들이 키보드를 치는 것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부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다음 글에서는, 진화가 사실로 규명되기까지 큰 역할을 했던 키 플레이어들을 모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거기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올바른 단어의 정의를 알고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보며, 창조설자의 경우, 이런 단어를 혼용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면에서 오늘은, 단어의 정의에 관해서 조금 짚어보고자 합니다. 창조설, 창조주의, 창조론의 단어에 대해서는 스켑티즈의 다른 글을 추천드립니다.
기본적인 부분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진화학과 창조과학에 관한 사실들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창조설자들은 대화에서 진화, 진화론, 진화학, 진화주의, 사회진화론, 지질학을 비롯한 기타 과학을 모두 진화론이라는 이름 하에 뭉뚱그려져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식의 혼용은 사실상 사람들의 혼란을 불러일으키며, 실제 단어의 의미마저 헷깔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각각의 단어의 의미와 사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과학계에서 진화의 의미는 몇가지로 쓰이는데,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종분화를 통해 생물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현상은 관찰이 되므로, 과학계에서 진화 자체는 "명백한 사실" 혹은 "관찰되는 자연현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는 집단 유전학의 대립 유전자 빈도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의 정의를 포함하며, 앞에서 말한 정의에 종내의 변화를 포함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로 규명되기까지의 과정은 새로운 스켑티스 글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진화"라는 단어는 보통 아래의 그림과 같이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 그림은 진화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나타낸다는 점이나 쉬운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점등의 장점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진화에 대한 오개념을 줄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이것 때문에 마치 원숭이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 하빌리스로, 네안데르탈인으로, 현생인류로 변하는 것이 진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는 창조설자들이 자주 묻는 질문인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되었다면 왜 원숭이가 있나요?"의 원천이 됩니다. 이러한 오개념은 사실 19세기 다윈 시대부터 있었으며, 그당시 종의 기원을 안 읽은 사람들이 다윈을 원숭이로 풍자해서 그린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창조과학회에서는 마치 초기 진화론에서는 그런식으로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도 원숭이가 사람이 된다는 주장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이는 순전히 진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 오개념일 뿐입니다. 진화 자체의 개념은 그 당시부터 이미 잡혀져 있었고, 현대진화학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종'의 정의가 세분화되고, Rapid Evolution들이 관찰되면서 이것이 "관찰되는 자연현상"으로 밝혀진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래 그림을 항상 잘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진화에 대한 또하나의 오개념은 진화가 개체에서 정의된다는 착각입니다. 진화는 개체군에서 정의되는 현상으로서, 일반적으로 집단 유전학과 함께 연구가 되는 부분입니다. 앞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개체군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개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다른 것은 일반적이며, 여기에 관해서는 나중에 새로운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인 진화의 메커니즘은 변이에 의한 다양성 증가, 이주나 유전적 부동에 의한 유전자풀의 빈도 변화, 그리고 자연선택에 의한 분단성 선택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관찰되었으며, 현재는 전과정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일부 창조설자들은 진화가 진보라 주장하며, 마치 새로운 것이 생겨야만 진화이고 나머지는 퇴화다라는 식의 엉터리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이것도 역시 오개념 중 하나입니다. 진화는 정의에서 보듯 다양성의 증가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퇴화도 진화의 일부입니다. 퇴화라는 방식으로 통해 다양성이 증가하므로, 퇴화 역시도 진화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과학계에서 소진화(microevolution)라는 단어는 매우 오래되어 더이상 사용되지 않는 단어에 가깝지만, 본래의 의미는 종 내에서 일어나는 진화 현상을 의미하며, 이것을 대진화에서 구분짓는 것은 "종"의 개념입니다. 과거의 종의 개념은 형태학적인 부분에 기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종의 개념이 생식 가능에 의해 재정의되었으나, 이것은 유성생식을 하지 않는 종들이나 식물등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종의 정의 자체가 상당히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이런 기본적인 종의 개념은 진화 연구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진화는 인정하나 대진화는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현대과학에 한참 동떨어진 과거시대 유물을 끌어안고 있는 행동이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현재는 과거에 정의되었던 대진화 자체도 관찰이 가능하며, 그런면에서 소진화와 대진화 둘다가 관찰이 되는 현상인 것이므로, 이는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다"와 비슷한 주장이 됩니다.
진화론은 증명이 된 과학 이론이자 학문으로서, 현재는 진화론이라는 단어보다 "진화학"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증명된 이론이 갖는 포괄성을 통해 새로운 학문을 개척한 것은 비단 진화학 뿐 아닌 세포학이나 유전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학이 증명되는 과정은 진화 현상의 관찰과, 진화현상을 뒷받침하는 화석을 비롯한 근거들, 그리고 이론의 포괄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며,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세포이론"이 있습니다. 현재 이것은 주로 "세포 생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사실 창조설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진화론"인데,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의 정의에 따른 "진화론"은 생물학 뿐 아니라, 천문학, 지질학, 핵물리학, 생화학(화학진화)을 비롯해 다양한 학문에 걸쳐 있는 것이라 주장하며, 그 내용조차도 진화현상과 진화론(진화이론), 뒤에 설명할 진화주의까지 다양한 부분을 포함하는 것으로 재정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크나큰 오개념으로서, 마치 진화론이 모든 것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때로 진화와 진화론의 차이를 이해하는 일반인들조차도, 마치 진화론이란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우리가 나오기까지의 진화과정을 설명한 이론이라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정확히는 이런 생명 나무는 진화학의 일부에 불과하며, 사실 진화학 자체는 이 진화 현상의 원리와 그 속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며, 이 분야의 핫한 주제는 진화의 속도 변화를 결정하는 요인,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로서 이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있어오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생명 나무는 이러한 연구의 부산물이자, 진화의 과정 연구를 통해 알아낸 연구의 결과물로서, 유전학의 발달과 함께 점점 더 정확해져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의 착각중 하나는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에 관한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생명의 기원은 생화학의 한 분야인 화학진화에서 다루는 개념이며 진화학은 생명의 역사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사실상 생명의 기원과의 관계는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진화학은 사실상 유전학과 함께 발달하고 있는 상황이며, 서로 수많은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진화학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유전학은 집단 유전학으로서 제가 매년 참석하는 학회인 ASHG(American Society of Human Genetics에 가면 이 분야에 관한 포스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창조설자들의 대부분은 화학진화가 진화학의 일부분이라는 오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화학진화는 진화학에 포함되지 않으며, 생화학에 속하는 생명의 기원 연구로서, 진화학과는 달리 아직 현상 자체를 연구중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알려주는 진화의 과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최초의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느냐에 대한 이론인 화학진화는 현재 몇가지 밝혀진 이론들과, 몇가지 불분명한 부분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화학진화 중에 현재 밝혀진 부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유기물의 생성: 밀러-유리 실험과, 2015년의 레이저 RNA 합성 실험이 있습니다. 2) DNA와 단백질의 생성: RNA월드 3) 막의 형성: 코아세르베이트를 비롯한 기본적인 부분 (다양한 연구가 진행중입니다) 4) 생명의 기원 장소: 연구중
원시 유기물의 생성은 어느정도 발견이 된 상태이고(밀러 유리 실험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며, 창조과학회의 주장과는 달리 원시 대기는 환원성이었고, L형 아미노산에 대해서는 새로운 글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DNA가 먼저냐 단백질이 먼저냐라는 질문 역시 이미 해결된 질문입니다. RNA월드라는 "정답"이 있습니다.. (Ribozyme과 RNA dependent RNA polymerase : pi6계열) RNA World는 증명된 가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학진화는 진화와는 달리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결코 창조설처럼 허황된 설명같은 것은 아닌 이유는 이렇게 중요한 증명된 이론들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며 수많은 과학자들이 지금도 이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진화와 진화이론을 포괄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들을 묶기 위해선 우선 생화학과 진화생물학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들이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화학진화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해서 진화학을 공격하거나 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앞의 개념들과는 다르게 진화주의는 사상이며, 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창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진화론"의 개념과 비슷한데,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진보"로 표현한다던가, 과학에서 사용하는 의미로서가 아닌 일상에서의 "우연"의 개념을 이용해서 원인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진화주의는 진화학의 개념과 오개념을 일부 이용하기도 하며, 이것이 오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사상적으로 발전할 경우 무신론과 관련될 수 있으며, 오개념을 사용할 경우 아래에서 설명하는 사회진화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진화적 유신론의 경우 진화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며, 이는 과학이 아닌 사상적인 부분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진화주의는 진화론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화주의를 향한 공격을 하면서 과학의 진화학을 공격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행동입니다.
사회진화론 역시 진화론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는 사실상 진화론에 대한 오개념들이 많이 들어있는 사회적 사상으로서, 진화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진화학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종내 경쟁을 강조하는 등, 상당히 진화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일부 창조설자들은 "진화론은 사회진화론과 과학진화론으로 나뉘어진다"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진화론은 생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며, 이는 사회진화론과 거의 관련이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회진화론은 진화론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진화론에 대한 오해에서 생겨난 것인데다가, 아주 일부 단어들을 빼와서 사용한 경향이 있습니다.
우생학은 진화론에 포함되지 않으며, 완전히 진화와 동떨어진, 유사과학입니다. 우생학은 오히려 우성과 열성을 갖고 누군가 우월하다는 주장을 하던 일부 초기 유전학과 더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진화의 개념과 완전히 상반된 주장입니다. 그러면 과연 진화학이 우생학의 아이디어가 되었던 것은 사실일까요? 진화학이 처음 시작한 해는 바로 다윈의 종의기원이 출판된 해인 1859년입니다. 만약 진화학이 우생학을 생기게 하는 아이디어가 되었다면, 우생학은 진화학이 생긴 1859년 이후에 첫 아이디어가 구상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생학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우생학"이라는 용어가 종의기원을 읽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 사람의 주장에 의해 생기기는 했지만, 이것이 진화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히틀러가 성경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정도이며, 다들 아시듯 사회진화론은, 이름만 진화론일 뿐, 진화학과는 아무 관련없는, 진화를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다윈이 타임머신을 타지 않았다면, 그리스 시대에 존재하던 우생학적 사고방식이 과연 진화때문이라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결론적으로 우생학이 진화학에게 받은 영향은, 사회진화론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진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잘못 이해해 만들어졌다는 것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히틀러가 성경을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왜곡해 사용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사실상 진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우생학에 의한 인종차별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종차별의 시작은 식민지 시대에서 시작하여 미국의 독립전쟁때에도 있었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을 끝으로 노예제가 종지부를 찍으면서 끝나게 되겠죠.다들 아시듯 1783~1865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독립전쟁부터 남북전쟁 끝까지) 다윈이 타임머신을 타지 않았다면 인종차별이 진화에서 나왔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할 수 없겠죠. 뭐 그리고 만약 1959년부터 65년까지가 차별의 역사라고 억지를 부린다면, 우리는 가벼운 사실을 알려주면 됩니다. 남북전쟁에서 노예제를 옹호한 것은 바이블 벨트에 해당하는 남부이며, 이들은 현재 남침례교의 기초가 되는 집단입니다.
진화학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많은 사람들이 잘못 사용하는 개념들이 많습니다. 이런 점에 대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단어가 진화에서 사용되는지를 정확하게 구분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중의 경우 "적자생존"이라는 단어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고, 창조설자들은 전혀 관련없는 "약육강식"같은 것을 끼워넣기도 합니다.
적자생존의 의미는 살아남은 자들이 적자이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적자만이 생존한다라고 오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원래 명제의 역으로서 항상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적자생존을 통해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자연선택 뿐 아니라 유전적부동의 영향 역시 받으므로 항상 환경에 대한 최적합성 개체군은 아니며, 진화의 정의상 높은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망막의 장단점에 대한 스켑티즈의 다른 글 은 이러한 다양성의 사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적자생존의 의미가 왜곡되어 위의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것은 하나의 종이 아닌 다수의 종의 경우에만 성립하므로 이것 역시도 잘못된 적용입니다. 운자생존이라는 주장은 진화학에서 사용되지 않으며 잘못된 개념으로서 적자생존에 대한 오개념 때문에 생긴 단어입니다.
결론적으로 적자생존에 필요한 생존경쟁은 오늘날의 경쟁사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 말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오래 살자. 죽지말고 자손을 많이 남기자.정도가 될 수 있으므로 어쩌면 자살방지 캠페인의 문구로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겠죠.
도태는 자연선택에서 밀려난 종의 개체군이 절멸하거나 다른 변화를 거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첫번째의 경우 교과서에서도 잘 설명하듯, 목이 짧은 기린들은 다 죽는것과 같은 현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번째로, 이들 역시도 각자의 생존 전략에 의해 다른 생태학적 지위를 찾아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목이 짧은 기린의 경우 달리는 속도가 빠른 개체군들쪽으로 선택이 일어나는 기린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 케이스가 있습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생명체는 바로 이 두번째 과정을 거치면서 생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다른 글에서 사실상 진화는 우연과 관련이 없다.라는 글을 쓴적이 있는데, 이것은 우연의 정의가 일상의 우연일때에 한하며, 과학에서 사용하는 무작위성에 대한 내용이라면 그 답은 약간 달라집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긴 글이 될 것으로 예상되어 나중에 새로운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약육강식은 사실상 진화와는 무관한 개념입니다. 이는 생태학에서 먹이사슬과 관련된 단어로서, 생태학적 지위가 다른 생명체끼리의 상호작용에서 사용됩니다. 생태학적 지위가 같은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경쟁이며, 개체군 유전자풀의 빈도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진화입니다. 만약 약육강식을 이런 생명체들에게 적용하면 이는 사실상 진화와 반대 개념이 되어버리는데, 이는 개체군이 획일화됨으로서 다양성이 감소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는 약육강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창조설자들을 비롯해 대중의 일부도 때때로 "진화론을 믿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진화론은 증명된 과학이론입니다. 진화가 사실이라는 것은 관찰된 사실이며, 진화이론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생명나무를 포함한 모든 과학적 결과를 수용하는 것을 우리는 진화를 이해한다.라고 말하며, 진화학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지만 진화학의 과학 결과들을 신뢰하는 것은 진화학을 수용한다. 혹은 받아들인다.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진화학은 여타 다른 과학과 마찬가지로 "반증"가능성을 포함하며, 현상이 관찰마저 되므로 종교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다"라는 표현은 틀렸으며, 자제해야 합니다.
진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 어떤 신념도, 믿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관찰이 되고, 재현마저 가능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라는 것은 가치중립적 사실이며,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판단에 기초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설자들이 사용하는 "진화론의 전도사"라는 말 역시 틀린 말입니다. 과학을 "전도"한다는 주장은 예를 들면 "오늘 가게에 옷을 신고 갔다"라고 쓰는 식이죠.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과학적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전도와는 다른, "교육"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과학적 탐구는, 가설을 증명하고, 증명된 가설들이 또한번 검증되고 포괄성을 띄게 됨으로서 이론이 되며, 그 이론이 증명되고 관찰이 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합니다. 과거 과학자들은 추리소설에서 나오는 명탐정들처럼 계속 증거들을 수집하고 찾아냄으로서, 이 진화라는 과정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현재 진화는 이렇게 관찰까지 된 사실이기에, 우리는 진화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창조설자와 대중들의 글은 다음과 같은 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적 관점" "진화론적 논리" "진화론적 의견" "진화론적 설명"
이 단어들은 잘못된 단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진화론(현재는 진화학)은 증명된 과학이론이자 학문으로서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헷깔려서 진화주의와 혼동하게 될 경우, 저런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또한가지 어패가 있습니다. Evolutionary를 "진화적"이 아닌 "진화론적"으로 번역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Evolutionary는 '진화에 의한' '진화적'이 올바른 표현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진화에 의한 결과로 생긴 것이거나, 진화과정중의 관계에 대해 표현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단지 진화학 이론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에서의 거리나, 진화 생물학에서의 데이터를 나타낼 때에는 진화적을 사용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Theory of Evolution(진화론)의 "이론"부분에 대해서 reference를 할 때에도, 이것이 학문이 됨에 따라 "진화학적"이 좀더 올바른 표현이 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표현은 진화적, 혹은 진화학적이 되어야 하며 "진화론적"은 사용하지 않을 것을 당부드리고자 합니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포론자나 중력론자, 상대성 이론자가 없는 것처럼 진화론자라는 단어를 정의할 수 없습니다. 외국에서 사용하는 Evolutionist는 Evolutionism(진화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진화론과는 사실상 크게 관련있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피어리뷰를 해주신 지인분에 따르면 Evolutionist라는 단어는 학자들도 실제로 사용하는 단어라고 하며 사실 진화학자들의 총칭정도라고 합니다. 이럴 경우, 비록 관습적인 단어인 이것의 번역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다르게 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여전히 과학이론에 "자"를 붙이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진화학자를 사용하는 것이 나은 것으로 보입니다.
창조설자처럼 한가지 유사과학을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며, 진화론 자체는 과학이론이므로 여기에 "자"를 붙인다고 해서 과학이론의 지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진화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진화학자, 진화 생물학자, 진화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진화학 전공자, 진화학을 지지하는 일반인은 정상인이 올바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단어의 올바른 사용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각각의 부분에 대해서는 스켑티즈의 다른 글들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을 증명하면 25만 달러를 현찰로 주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분이죠.
네. 캔트 호빈드 '박사'입니다.
창조론의 거두이며 유튜브에서 활동하시는 분이며 창조과학회에서 밀어주는 그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봤습니다. 창조과학회의 거두인 캔트 호빈드 '박사'의 박사학위를 말이지요.
"Hello, my name is Kent Hovind. I am a creation/science evangelist. I live in Pensacola, Florida. I have been a high school science teacher since 1976. I've been very active in the creation/evolution controversy for quite some time."
'안녕, 내 이름은 캔트 호빈드야. 난 창조/과학 전도사이지. 나는 플로리다 펜시콜라에서 살고 있어. 1976년부터 고등학교 과학교사로 일했지. 나는 창조/과학 논쟁에서 꽤 오랫동안 활동했어.'
여러분. 캔트 호빈드 '박사'의 '박사' 학위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진화에 관해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명백한 사실 몇가지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진화는 하나의 관찰되는 현상으로서, 종분화를 통해 생명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찰가능한 가재의 종분화나 렌스키의 대장균의 종분화, Tomcod의 종분화, 도마뱀의 종분화를 비롯하여, 이러한 진화의 과정은 직접 관찰이 가능합니다. 즉, 진화 자체는 관찰이 되는 자연현상입니다. 여기서 창조설자들이 '가재가 가재가 될 뿐이고' 따위의 말을 하면 현혹되지 말으셔야 합니다. 우선 표현형, 즉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DNA의 부분은 매우 적은 부분입니다. 심지어는 점돌연변이 하나로 적혈구가 겸형 적혈구가 되는 것처럼요. 또한, 일반적 종의 정의에 따라 Marble 가재는 이전의 종과는 다른 종으로 분류가 됩니다. (클래식한 정의에 따른 생식 불가능, 그리고 현대적 정의에 따른 유전적인 차이가 둘다 존재합니다.) 창조설자들이 형태학적인 부분만을 갖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부 창조설자들이 주장하는 것 중에 지름이 100km짜리 돌덩이가 지구에 낙하해서 대부분의 생물이 사라져 버린다고 하면 지식은 다 의미없는 것이 될 것이라는 일종의 공포를 가장한 주장이 있는데, 그런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살아남은 생명체는 계속 진화할 것이며, 그러다보면 지적인 능력을 갖춘 생명체가 또 나타날 수 있고, 탐구를 통해 진화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알아낼 것입니다. 진화는 그정도로 명백한 사실이니까요. . 진화라는 것은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로 정의됩니다. 이것이 과학계에서 통용되는 진화의 정의이며, 그러므로 진화학에서는 어류나 양서류가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진 친척이라고 말하지 하등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부 창조설자들이 주장하는 "임신 초기의 아기는 진화단계에서 어류나 양서류 단계라는 인식으로 인해서 살해를 해도 무방한 동물로 여긴다."라는 주장은 진화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오히려 진화에 반대되는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화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진화이론, 즉 진화론은 생물학에서 세포론이나 중력론과 마찬가지로 증명된 이론입니다.
참고로, 과학에서의 증명은 수학과는 다릅니다. 과학계에서 이론의 증명은 그 현상이 관찰되어야 하고, 그 현상의 메커니즘에 관한 포괄성을 갖춰야 합니다. 저 세가지 이론은 그것을 만족하므로 증명된 이론으로 불리며 현재는 '진화학' 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과학에서 절대적 진리는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 진화론을 적용하려면 세포론이나 중력론을 같은 위치에 놓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법칙'이란 수식으로 나타내어지는 것들만을 표현 하므로, 생물학에서 '법칙'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법칙'인 것들도 이론과 마찬가지로 수정이 가능해지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멘델의 법칙' 이 깨진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죠. 이론이란 포괄성을 갖춘 것으로, 법칙과는 다른 형태인 문장으로 표현이 됩니다.
대립되지 않습니다. 이 기사가 하고자 하는 말도 그것이며, 이를 "진화적 유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모든 과학적 사실을 수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경해석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신학적 갈래이며, 물론 저는 신학자가 아니라서 부족한 부분이 많기에, 신학자분들께 도움을 받는 실정입니다. 심지어는 창조설자들이 자주 들이대는 성경 구절인 "종류별로"라는 부분 역시 진화의 각각의 갈래를 표현한 것의 은유로 볼 수도 있는 것처럼, 진화가 사실이라고 해서, 이게 창조'론'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켄트 호빈드를 비롯한 "창조설: 진화에 반대하는 주장" 혹은 "창조과학' 은 거짓말이며, 이는 오히려 창조주를 거부하는 행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 켄트 호빈드 같은 사기꾼들의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과학자들이 반박할 이유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올바른 과학을 받아들이는 방법 중 하나는 Biologos.org 혹은 페북 그룹인 "한국의 진화적 유신론자" , "과학과 신학의 대화" 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서적으로는 우종학 교수님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혹은 데보라/로렌 하스마의 "오리진"를 추천드립니다.
우선 유전정보가 증가하는 현상은 자연계에서 항시 일어나며, 이는 DNA의 변이를 통해서 혹은 트랜스포존등의 독특한 방식으로 형성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유전정보를 정확히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과학에서의 유전정보란 : 개체군 내에서의 유전적 다양성을 의미합니다. 창조설자들이 이 정의를 안 사용하고 다른 정의를 비틀어 쓰기도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스켑티즈의 글, "유전정보는 항상 증가한다"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전정보의 최초 생성은 진화학이 아닌 화학진화쪽의 질문으로서, 이점에 관해서는 과연 현재 유전물질이 과거에도 유전정보로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초에, 현재 "유전정보"로 사용되는 DNA와 RNA는 일종의 효소로서 작용했습니다. 이를 Ribozym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사실, 현재에도 epigenetics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런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
과학은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실제 과학자들 역시도 제 전공분야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잘 모릅니다. 다들 쉽게 보는 "세포이론"조차도 수천 수백가지 이상의 연구가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모두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일반적입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신경전달물질의 방출(Secretion) 과정 하나만 보더라도 리본형 시넵스와 Kiss&Run 작용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대중화에 힘쓰는 과학자들도 많고, 이를 단순화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현재의 고등학교 과학과 같은 것이 나온 것인데, 문제는 창조과학회의 사기꾼들과 싸우는 황당한 일을 겪어야 하니 난감한 상황을 겪기도 합니다. 일반인에게 이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점은 너무나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점에서 제리 코린의 왜 진화는 사실인가-지울수 없는 흔적 을 추천드리고자 합니다. 인류의 진화에 관해서는 이상희 교수님의 인류의 기원을 추천드립니다.
사실상 없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진화를 극렬하게 반대하던 남침례교가 현재 미국 KKK단의 시초인 것을 보고 "인종차별이 기독교 때문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진화가 진보라고 주장하면서 같은 종 내에 적용하였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은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며, 마치 성경을 이용해 자기의 권위를 세운 히틀러를 보며, 이게 다 성경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진화론때문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인종차별을 일으킨 우생학은, 진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차별하고자 하는 마음에 옆을 둘러보다가 진화를 제대로 이해못하고 대충 끼워맞춘 것입니다. 그것은 종의 기원에서 다윈이 말한 생존의 개념(이타적 행동을 포함)에 대해 "약육강식"이라는, 진화와 동떨어진 개념을 덮어씌운, 그야말로 사실상 진화론에 반대되는 내용이었으니까요. 그러므로, 진화론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와 무관합니다. 진화론이 발견되지 않았어도, 히틀러와 스탈린은 다른 방법으로 자기들의 권력을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진화론은(심지어는 잘못 이해) 그냥 핑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인종 우월주의와는 관련없다고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죠? 마치 히틀러가 성경을 자기에 맞춰 편집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연"의 정의가 우리의 일상에서 말하는 "우연"일 경우, 관련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화에 대한 이해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질문이라고 봐도 문제없습니다. 변이의 발생은 무작위적이지만, 그 무작위성이 환경의 영향을 통해 유전적 부동이나 자연선택을 통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이 바로 진화의 과정입니다. 물론 과학에서 정의하는 우연의 의미는 다르며, 그 정의에 따를 경우 답은 조금 달라집니다만, 여기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을 쓰므로 "우연"의 정의가 일상에서의 정의라고 가정하고 글을 쓰겠습니다.
이 환경의 변화 자체를 우연이라고 한다면야 우연이 되겠지만, 그것의 원인에 대해서는 진화학은 말하지 않습니다. 진화학은 생물학이니까요. 즉, 과학에서 말하는 무작위성이라는 것은 '원인이 없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랜덤으로 선택될 수 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것은 과학에 억지로 하나님을 끼워맞추는 행위에 대해서는 배제하지만, 사실 그것은 오히려, 틈새의 신이 되는 것을 방지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면에서 창조설자들이 진화를 비방할 때 주로 사용하는 "이런 복잡한 것이 어떻게 우연히 생길 수 있느냐"에 관한 질문은 아예 잘못된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기원은 화학진화 라고 부르는, 이름만 진화이고, 생화학 분야에서 연구하는, 완전히 다른 주제입니다. 진화학은 생명의 역사만 다루는 학문입니다. 진화학은 증명된 이론이자 학문이라면, 화학진화는 아직 밝혀져가는 가설에 가깝습니다. 이 둘을 다 포함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초에 창조, 이후에 진화라는 식으로 끼워맞춘 주장은 '진화적 창조론'이라 불리며 위에서 설명한 '진화적 유신론'과는 다른 것입니다. 진화적 유신론은 이런 화학진화의 과정도 어느정도 수용합니다. 과학 가설이란 것은 어느정도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며, 밀러-유레이 실험이나 최근의 RNA레이져 합성 실험등은 이를 뒷받침 합니다. 밀러 유레이 실험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은 거짓입니다. 위키를 참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그들이 하는 거짓말을 알아차리기 힘드시다면 그들이 뭘 공부하였는지 보셨으면 합니다. 우선 켄트 호빈드는 신학자인데 박사학위 역시도 Patriot Univ라는.. 다 썩어가는 건물에 있는 이상한 곳에서 받은데다가, 탈세로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스켑티즈의 다른 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창조과학회의 대부분은 비과학자이거나, 생물학자가 아니거나, 유전학 비슷한 곳도 안 가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슨 생물학을 비판할 능력이 있을까요? 이들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자기들의 무지를 인정하거나, 과학자가 이야기를 하면 들으려 해야 할텐데 이들은 고집만 부리고 자기들이 맞다고 우기기만 합니다. 그들의 글을 분석하면 100%(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논문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거짓말을 합니다. 창조설, 즉 창조론을 과학적 사실로 보자는 주장은 우선 과학적으로는 명백히 말도 안되는 주장이지만, 문제는 그보다 더 큰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제7일 안식교의 앨런 화이트의 환상에서 시작한 것이며, 모든 성서학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성경에 권위를 부과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이는 성경을 모래성 위에 쌓는 셈이 되는 것이죠. 과학이란 계속적인 변화와 모든 것의 잠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과학의 시험대 위에 성경을 올려버리는 행동은 바로 창조설자들이 하고 있는 것이죠. 자연의 관찰을 과학에게 맡기고, 더욱 말씀에 치중한 방법만이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제 이쯤 되셨으면, 아니 진화가 이렇게 명백한 사실인데 이걸 반대하는 애들은 왜 생겨? 라는 질문이 드실때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선 돈입니다. 켄트 호빈드나 캔 햄같은 사기꾼들은 계속 자기 책을 팔아먹고 장사를 합니다. 벤 카슨(제7일 안식교)은 자기 정치 선전을 위해 이를 이용합니다. 거기에 휘둘리는 사람들에게 장사해먹으려는 얄팍한 수입니다. 과학자들이 왜 가만있을까를 보신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데 무관심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애들이라 상대할 가치조차 못 느끼거든요. 예를 들면 생물의 가장 기초가 되는 "유전정보는 항상 증가한다"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그야말로 생물학 전공서나 한번 읽어봐라 정도밖에 할말이 없는 것이죠. 현재 미국에서는 KKK단의 모태가 된 남침례교만 빼고는 대부분 진화적 유신론을 인정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기독교인 과학자들은 이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다만 창조과학회라는 사기꾼들과 싸워야 하는 점에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신학자들은 창조과학회의 주장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 창조설자들은 욥기에 그당시 과학자들도 알지못했던 지구가 공간에 매달려있다는 사실이나 대기의 흐름을 서술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욥기에는 눈창고 우박곳간이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상 일부분을 갖고 때려맞추는 형태의 주장을 통해 성경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위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공룡을 찾는다던가 하는 주장은 우선 잘못된 해석이라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학적인 책도, 과학책도 아니라는 것이 올바른 견해입니다.
과학자들의 대부분이 무신론자가 된 배경에는 사실, 창조과학회와 창조설이 관여해 있습니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그냥 그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왠 과학은 전혀 모르는 인간들(창조과학회)이 자기들이 과학이라 우기며 거짓말을 하면서 내가 평생 연구하는게 거짓말이라고 억지를 부린다면? 과학자들은 진실을 밝히는 데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거짓말을 극도로 혐오하고, 사기를 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왠 이상한 애들이 나와서 거짓말로 대중을 현혹하는데, 그 이상한 애들을 교회가 덮어준다면..? 과학자들은 당연히 열받을 것이고 기독교가 이를 조장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 스스로가, 창조과학이나 창조설같은 거짓된 것을 몰아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통해 믿음이라는 것이,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화는 명백한 사실로 드러난 것이라.. 지금 이를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를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비종교로 만들어갈 뿐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진화는 명백한 사실이고, 진화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진화론 혹은 진화학은 현재 증명된 이론이자 학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당연하게 수용해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원문: 건사연 블로그 링크 1 건사연 블로그 링크 2 FRC 링크(영문)
대답: 사회과학과 심리학 분야에서는 실험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보통 집단끼리 서로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사회경제적 요소나 문화적 배경, 유년 시절의 경험까지 각종 변인의 영향을 최대한 제거해내야 한다. 그래야만 알고자 하는 것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설문 문항의 아무리 사소한 단어라도 결과를 정반대로 바꾸는 등 연구를 위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 단순히 날것의 데이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통계학적 분석도 해야 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연구는 그 사회적 파장이 클 수 있기에 연구자의 윤리적 판단도 강하게 요구된다. 자신의 편견과 가설에 결과를 끼워 넣는 일, 더 나아가 아예 날조하고 왜곡해내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이러한 점을 염두하고 건사연과 FRC 글을 비판적으로 읽어보자.
먼저, 얘네들은 다음 차트를 근거로 동성애 관계가 이성애 관계보다 지속 기간이 짧기 때문에 서로에게 헌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caption id="attachment_2336" align="aligncenter" width="500"] 시간에 따른 결혼 지속의 비율 Source: National Center for Health Statistics,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2001)[/caption] [caption id="attachment_2337" align="aligncenter" width="500"] 기념일에 도달한 결혼의 비율 Source: Current Population Reports: U.S. Census Bureau (2002)[/caption]
그런데 이들이 가져온 차트는 이성애자 '부부'의 데이터다. 이를 동성애자 커플의 지속 기간과 비교한다면 성적 지향에 따른 관계 지속 기간에 대한 적절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부부와 커플의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장기간 관계를 지속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때로는 아이를 낳고 싶은 사람들이 결심해서 하는 사회적 의례가 결혼이다. 그리고 부부라는 인식은 서로를 향한 유대감을 다시금 다져줄 수 있다. 이성애자 커플 중에서도 끈끈한 커플들이 결혼의 틀 아래서 더 끈끈하게 변한 집단을 데려다가 남성 동성애자 커플과 비교해놓았다. 이성애자 커플과 동성애자 커플을 비교했거나 이성애자 부부와 동성애자 부부를 비교해야 공정하다. 참고로 건사연이 참고한 FRC는 SPLC(남부빈곤법률센터: 미국의 비영리 인권법률지원단체)에서 혐오 단체로 지칭하는 보수적 종교 단체이며, 이 글을 쓴 사람이 Ph.D라는 게 나는 믿기지가 않는다. 그리고 단순히 금방 헤어지는 커플이 나쁘다면 그들을 비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커플의 지속 기간이 짧으면 그냥 나쁜 건가? 둘 다 행복하고 사회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헤어짐은 커플 당사자의 권리 아닌가?
[caption id="attachment_2338" align="aligncenter" width="500"] 현재 맺고 있는 동성애 관계의 지속 기간 Source: 2003-2004 Gay/Lesbian Consumer Online Census[/caption]
결정적으로 지들이 가져온 자료에 따르면 4년 이상 동성 관계가 지속되는 경우가 50%를 넘는다. 물론 이 사람들은 결혼한 사람들이 아닌 그냥 사귀거나 동거하는 사람들이다. 이 조사 결과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건사연은 이 자료를 편향적으로 해석하여 12년 이상인 동성커플은 15% 밖에 안 되니 결혼을 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펼친다. 차별받고 눈총을 받으면서, 결혼으로 맺어질 수도 없는 걸 아는 커플이 정도로 사랑하는 것만 봐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2005년 기준으로 이성 커플의 동거가 동성 커플의 동거보다 오래 지속되는지 비슷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1]. 2008년에 발표된 3년 간의 연구 결과, 시민 결합의 여부와 상관 없이 동성 커플이 결혼한 이성 커플보다 관계의 질과 친근감이 높았으며 갈등의 정도가 낮았다[^2]. 같은 연구에서 시민 결합을 했을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깨질 확률이 낮았다. 이는 시민 결합이 커플을 오래 지속시켜 주었거나 오래 지속되는 커플이 시민 결합을 하게끔 되었거나 등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2008년에 실시된 다른 연구에서 동성 커플과 헌신적인 이성 커플은 평가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나지 않았다[^3]. 이 연구에서는 실험실에서 질적인 측면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심장 박동, 피부 전도도 등도 측정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알고 있는 한, 동성애는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사악한 관계가 아니라 평범한 사랑의 한 종류다. 참고로 동성애가 정상적인 성적 지향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인 다음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인권, 사회 복지)에 기반해 동성애 차별주의를 저지하려는 곳은 미국심리학회(APA), 미국정신의학회(APA), 세계보건기구(WHO), 질병관리본부(CDC), 유럽연합(EU), 국제연합(UN) 등… 그러니까 정상적인 곳은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적 지향이라고 한다. 어? 왜 벌써 반박 끝난 것 같지?
두 번째로 가져오는 것은 게이 남성의 성행위 파트너 수다. 그들이 인용한 성행위 파트너 수의 조사(Bell & Weinberg 라던지)는 gay bar에서 표본을 얻거나 AIDS 위험성이 알려지기 전에 연구되는 등 불완전한 측면이 있고 이러한 조사는 일관적이지 않다[^4]. 2583명의 동성애자를 조사했더니 21.6%의 성행위 파트너 수가 101-500명이었고 10.2%~15.7%가 501-1000명, 10.2%-15.7%가 1000명 이상이라는 주장 역시 왜곡이 있다. 원래 논문은 2583면 중 10% 가량의 256명의 49세 이상의 게이 남성을 조사한 것이며, 그 중에서 21.6%가 101-500명이고 나머지 범위(2-10명, 11-20명, 21-50명, 51-100명, 501-1000명, >1000명)가 각각 10.2%~15.7%[^5]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런 나머지 범위의 퍼센트가 같다고 놓는다면, 49세 남성 256명 중 50% 가량이 100명 이상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보고는 신빙성이 떨어지고(제대로 셀 수나 있을까? 그리고 저들은 에이즈 인식이 없었을 때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다) 말했듯이 일관적인 결과가 얻어지지 않는다(예컨대 데이팅 업체 OKcupid가 최근 조사한 결과 게이 남성이나 이성애자 남성이나 중간값이 별 차이 없게 나온다던지). 어쨌거나 그나마 신빙성 있는 조사끼리 비교해보면 게이와 이성애자 남성 간의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OKcupid보다 신빙성 있는 최근 통계를 못 찾아서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특정 기간 동안의 성행위 파트너 수를 물어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어쨌거나 얘네들은 왜 성행위 파트너가 많으면 나쁘다고 생각할까? 많은 성행위 파트너를 갖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애꿎은 레즈비언까지 포함해서 동성애자 전체를 일반화해서 비난하는 것이 정당화되는가? 그리고 성행위 파트너가 많은 것이 나쁘다는 타당한 근거도 제시해야 한다.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적 지향의 한 종류로 이해하는 것이 정상적인 입장이다(다른 입장이신 분들한텐 미안하지만 객관적 사실이다). 이성애자들과 마찬가지라면 동성애자들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건사연과 FRC는 버몬트, 스웨덴, 네덜란드의 통계를 근거로 이들이 서로에게 헌신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버몬트 동성애자의 21%, 스웨덴 동성애자의 2%, 네덜란드 동성애자의 2.8%가 시민결합(네덜란드의 경우는 결혼)했다고 한다(모두 단편적인 추정이다). 그런데 커플이 반드시 결혼을 해야만 헌신적인 관계인가? 왜 시민결합/결혼한 동성 커플의 수가 적다고 무시하는가? 물론 이성애자의 결혼 비율보다는 낮다. 그러나 동성애자 집단은 이성애자 집단보다 훨씬 작은 크기에, 쉽게 짝을 찾기도 어렵고, 그밖에 각종 어려움이 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오히려 사회학계에서는 복지 체계는 커녕 여론의 지지도 미미한 상황에서 이들이 일궈낸 사랑을 옹호할 걸? 시민결합/결혼한 커플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으니(사실 그렇게 적은 것도 아니다) 동성결혼 합법화 요구를 묵살하자는 이들 단체의 빈약한 주장은 앞서 다뤘듯이 의구심만 낳을 뿐이다. 2006년 미국내 1억 110만 가구 가운데 비결혼 가정이 50%에 육박하는데, 이 비결혼 가정 중 결혼할 수 없는 동성커플이 상당수를 차지한다[^6]. 결혼 가정의 수가 적은 것이 걱정이라면, 오히려 이성애자 독신 인구와 비결혼 인구가 급증하는 현실에 눈을 돌리고 동성결혼을 허용해야 할 것 같다. 결혼 가정의 수가 적은 집단이 비난 받아야 한다면, 다음 타자는 순서대로 이성애자 집단과 독신자 집단이다. 다시 말하지만 결혼 가정의 수가 적은 게 왜 개인의 잘못인지도 이들 단체는 밝혀야 한다.
결국 이들 단체는 차별주의 단체다. 차별주의 단체는 동성애자한테만 온갖 잣대를 들이댄다. 여기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 어떻게 반응할까? 레즈비언의 장기간 파트너 외 정사는 이성애자 여성의 혼외정사보다 적다[^4]. 에이즈와 성병이 적기로 유명한 집단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다른 파트너와의 성관계를 허용하기로 약속한 게이 커플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와 별 차이가 없는 부분이[^7] 꽤 많다. 그래서 이들이 레즈비언을 장려하는가? 게이의 자유분방한 연애를 인정하는가? 그렇지 않다. 동성애 차별주의 단체는 자신들의 편협한 보수적 신념을 사회에 강요하기 위해서 사이비과학으로 포장한다. 동성애 차별주의 단체는 바른 성문화와 건강한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객관적인 기준에 신경을 썼더라면 동성애를 문제삼지 않고 그들의 인권 신장을 지지하는 정상적인 입장을 무시할 수가 없다. 무조건적인 차별이야말로 정상이 아니다.
참고: [^1]: Kurdek, L. A. (2005). What do we know about gay and lesbian couples?.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14(5), 251-254. [^2]: Balsam, K. F., Beauchaine, T. P., Rothblum, E. D., & Solomon, S. E. (2008). Three-year follow-up of same-sex couples who had civil unions in Vermont, same-sex couples not in civil unions, and heterosexual married couples.Developmental psychology, 44(1), abstract. 102. [^3]: Roisman, G. I., Clausell, E., Holland, A., Fortuna, K., & Elieff, C. (2008). Adult romantic relationships as contexts of human development: a multimethod comparison of same-sex couples with opposite-sex dating, engaged, and married dyads. Developmental Psychology, 44(1), 91. [^4]: Friedman, R. C., Downey, J. I. (1994). Homosexuality, N Engl J Med, 331, 923-930 [^5]: Paul Van de Ven et al., "A Comparative Demographic and Sexual Profile of Older Homosexually Active Men," Journal of Sex Research 34 (1997): 354. [^6]: 네이버 뉴스 [^7]: Hosking, W. (2014). Australian Gay Men's Satisfaction with Sexual Agreements: The Roles of Relationship Quality, Jealousy, and Monogamy Attitudes. Archives of sexual behavior, 43(4), 823-832.
]]>"논문은 결론이 아니라 데이터가 중요하다. 논문 쓴 사람이 진화론자이니 당연히 진화의 결과를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데이터는 그렇지 않다."
자.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논리인지 한번 봅시다. 우선 정확히 말하자면 첫문장은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논문은 결론이 아니라 데이터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며, 때때로 저자들이 결론을 잘못 내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고, 결론은 저자들의 몫이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 전제는,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논문을 이해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데이터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수년간의 공부가 필요하며, 제가 지금 밟고 있는 박사과정도 그중 하나입니다.
논문에서 저자들이 내린 결론이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할 정도로 논문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창조설자의 경우는 1)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전의 수렴진화에 관한 한 논문은 H1, H2라는 트리를 제작해서 수렴진화를 연구하는 간단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이것이 논문의 핵심인데, H1, H2가 의미없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창조설자가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렇다면 왜 그 데이터를 본 모든 과학자들은 진화가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릴까요?
그리고 2)는 단지 "저자들의 성향"뿐이 아니라, 저자들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논리입니다. 예를들어, Camilo Golgi와 Santiago Ramon y Cajal의 뉴런 네트워크와 뉴런이론을 비교할때, 저자들이 원래 골지의 아이디어대로 생각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하지 않으면, 그들의 성향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즉, 창조설자들이 "이건 진화론자들이 썼으니 이런 결론이야"라는 주장은 편협한 거짓말에 불과하게 됩니다.
물론, 진화는 이미 관찰이 가능한 것이므로, 더이상 할말이 없는게 당연하지만, 만약 이것이 개인의 주장이라고 가정했다 하더라도, 그 어떤 과학자도, 자기의 주장에 따라 결론을 억지로 내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3)은 이 저자와 비슷한 실험을 토대로 해서 나온 결론들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것은 제가 매일 밥먹듯 논문을 읽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이것을 통해 과학계 전반의 생각을 이해하고,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니까요.
그러므로 이 세가지의 기본적 이해가 있어야, 저자들이 올바른 결론을 내렸는지, 아니면 무언가 수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판단이 설 수 있는 것이죠.
논문의 데이터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결론보다 데이터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즉, 데이터가 중요하다는 말은 창조설자가 할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대답: 차별주의자들은 종종 게이들에게 온갖 비하적 표현을 쓰면서 변실금의 위험을 강조한다. <동성애자의 양심고백>이라는 차별주의(심지어 여성혐오적이기까지 한) 만화에서는 "동성애자 세계에서 항문 성교를 하지 않으면 장애인 취급을 거의 당하"고 "항문 성교를 하게 되면 ...(중략).. 항문이 완전히 망가진다", "변을 그대로 줄줄 싸게 된다"고 주장한다(참고로 건사연은 이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 이처럼 항문성교를 하면 괄약근에 이상이 생기거나 변실금을 초래한다는 믿음이 꽤 퍼져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믿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근래 들어 차별주의자가 변실금 드립을 치면 나는 의학적 근거를 달라고 맞서왔는데, 마침 시기 적절하게 건사연이 논문을 소개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건사연이 직접 초록을 번역해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그들의 학술적 수준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 논문[^1]을 보자. 40명의 AR(anoreceptive, 항문으로 음경을 받아들이는) 동성애자 남성과 14명의 non-AR(AR이 아닌) 이성애자 남성을 조사한 결과다. 40명의 AR 동성애자 남성 중 14명이 변실금 증세를 호소하였고, 14명의 non-AR 이성애자 남성 중 한 명만이 호소하였다. AR 동성애자 그룹이 non-AR 이성애자 남성 그룹보다 항문 휴지기 최대 압력이 유의미하게 낮았다. 변실금을 호소하는 동성애자들은 변실금이 없는 동성애자들이나 이성애자들에 비해 자발적인 최대 압착 압력이 유의미하게 낮았다. 대변 밀도, 배변 빈도, 직장 감각에는 차이가 없었다.
중요한 점은 조사 대상의 AR 동성애자 남성 40명 중 23명이 HIV 양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HIV 감염으로 인한 후천성 면역결핍의 결과로 신체적 변화와 잦은 장 질환이 생겨서 변실금이 생길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2] 이는 곧 항문성교와는 별개의 인과가 존재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며, 뿐만 아니라 표본의 수가 작기 때문에 이 표본집단이 모집단을 대표한다고 보기 힘들다. 결국 이 논문은 '항문성교는 변실금을 유발한다' 또는 '많은 게이가 변실금을 호소한다'이라는 선입견을 입증해주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이 논문 저자들도 논문 끝부분에서 '심각하지 않은(minor) 변실금의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 '낮은 위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항문성교를 할 때 적절한 준비가 있으면 변실금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걸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논문[^3]은 어떨까? 이 논문을 구할 수는 없어서 초록만 읽었다. 그런데 읽다가 빵 터졌다. 왜냐하면 건사연이 주장하는 바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첫 번째 논문이 나오고 4년 후에 출판되었는데, 14명의 AR 동성애자 남성과 10명의 non-AR 이성애자 남성을 조사했다. 이 논문에서 AR 게이와 non-AR 이성애자 남성사이에 최대 압착 압력에 차이가 없었다. 또한 항문 휴지기 최대 압력에는 AR 동성애자 집단이 non-AR 이성애자보다 유의미하게 낮았으나, 항문 휴지기 전체 압력에는 서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는 것을 볼 때, 단지 심리적인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항문의 압력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장치를 항문 안으로 밀어넣어야 하는데, 이 떄 AR 게이는 별 거부감이 없지만 non-AR 이성애자 남성들은 긴장을 해서 힘을 주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휴지기 항문 최대 압력의 유의미한 차이마저도 의학적으로는 의미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항문 괄약근(IAS와 EAS)의 구조에도 별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항문으로 음경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항문 괄약근 구조와 기능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으며. 따라서 건사연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와 정반대의 논문을 들고 온 것이다! 변실금에 대해 종합하는 논문(4)이 이 논문을 인용했는데, 여기서도 항문성교가 괄약근을 손상시킨다는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논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변실금의 가장 흔한 원인은 여성이 출산할 때 겪는 외상이다[^4][^5]. 변실금 때문에 동성애를 막으면 훨씬 위험한 출산도 하지 말아야 하나? 더군다나 모든 게이가 항문성교를 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이 그것만 하고 앉아있는 것도 아니다. 애꿎은 레즈비언은 말할 것도 없다. 동성애는 성교가 아니라, 사랑의 한 종류다. 이런 의학적으로 근거없는 주장은 누가 하는 것일까? 건사연과 바성연 등 반동성애 집단의 자칭 전문가들이 하고 있다.^6
이 사람들은 동성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되어있지 않아 보인다. '동성애' 대신 '동성연애'를 사용한다. '연애=성교'라는 것인가? 심지어 AR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여자 역활"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한다. 남성 동성애자는 성정체성(gender identity)이 남성이면서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 남성인 사람이다. 성정체성(gender identity)이 여성이라서 남성에게 끌리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읽으면서 "더우기", "역활" 같은 잘못된 표현이 개인적으로 거슬렸다. 나도 맞춤법 도사는 아니지만...ㅂㄷㅂㄷ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항문성교에 관한 지식들을 정리하는 글을 올리도록 하겠다.
참조: [^1]: Miles, A. J. G., Allen-Mersh, T. G., & Wastell, C. (1993). Effect of anoreceptive intercourse on anorectal function. Journal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86(3), 144-147. [^2]: Goldstone, S. E., & Welton, M. L. (2004). Anorectal Sexually Transmitted Infections in Men Who Have Sex with Men—Special Considerations for Clinicians. Clinics in colon and rectal surgery, 17(4), 235. [^3]: Chun, A. B., Rose, S., Mitrani, C., Silvestre, A. J., & Wald, A. (1997). Anal sphincter structure and function in homosexual males engaging in anoreceptive intercourse. The American journal of gastroenterology, 92(3), 465-468. ABSTRACT [^4]: Rao, S. S. (2004). Pathophysiology of adult fecal incontinence. Gastroenterology, 126, S14-S22. [^5]: Kamm, M. A. (1998). Faecal incontinence. BMJ: British Medical Journal, 316(7130), 528. [^6]: 신태진, (2013) 동성애, 유전자와는 ‘무관’ 에이즈와는 ‘유관', 크리스천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8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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